12.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20. 고재종 시/ 1. 고재종 시 모음

월정月靜 강대실 2025. 2. 4. 08:06

고재종 시 모음

 

1957년 전남 담양 출생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새벽 들>,<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앞강도 야위는이 그리움>,<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수필집 <쌀밥의 힘>,<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13, 14, 15회 3년 연속 소월시문학상 추천우수작상

2002년 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신동엽 창작기금받음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

 

동안거(冬安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동ː-안거 (冬安居): (불교) 승려들이 겨울 90일, 곧 음력 10월 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일. ↔하안거. ▷안거. 동ː안거-하다 (자) 


푸른 자전거의 때


말매미 말매미 떼 수천 마리의 전기톱질로

온 들판을 고문해대어선

콩밭에서 콩순 따는 함평댁의 등지기 위로

살 타는 훈짐 피어오르는 오후 숲참때

 


저기 신작로 하학길을

은륜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막내녀석,

그 씽씽 그 의기양양

문득 허리를 펴다 가늠한 함평댁의 입이

함박만하게 함박만하게 벌어질 때

 


때마침 목덜미를 감아오는 바람자락과 함께

푸르고 푸른 풋것들이

환호작약, 온갖 손사래를 쳐대는 것이었다

  

날랜 사랑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수숫대 높이만큼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성숙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줄도 알거니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