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37
사랑의 변주곡/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시 ‘사랑의 변주곡’에서 사랑의 음악은 혼란의 소음과 흡사하며, 깊은 고요를 품고 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시의 처음을 압도하는 것은 단호한 명령과 선언이다. 이 목소리는 욕망의 입에서 쏟아진 삶의 생음(生音)을 사랑의 음악으로 변주하려는 강렬한 결의를 전달한다. 인간의 본능인 ‘욕망’을, 타자를 향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사랑’으로 고양하는 비법은 ‘발견’의 행위다. 그런데 발견은 무한히 갱신되는 것이기에, 욕망을 사랑으로 변주하는 작업은 끝없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4·19 혁명에서 배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이 바로 이것이다. 욕망의 어두운 현실에서 사랑의 빛나는 현재를 계속 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기술. “눈을 떴다 감는 기술”. 부패한 현실과 타락한 문명에 굴복했던 우리가 욕망에서 사랑으로 끊임없이 도약할 때, 그 사랑의 아슬아슬한 절도를 열렬히 유지할 때,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은 “소음과 광증(狂症)과 속도와 허위”(‘시골 선물’)의 도시에서 “사랑의 위대한 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때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은,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는 것이다. 김수영이 시와 산문에서 자주 다룬 ‘라디오’는 독재정치, 현대문명, 일본과 북한 방송을 금지한 비극의 역사, 언론 규제, 문화의 후진성, 생활 등을 다양하게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의 변주곡의 첫 음으로 선택된 라디오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닌, 사랑이 없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라디오 소리에서 출발한 사랑의 변주곡은 침묵의 속삭임이 되어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고, 어느새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밀려닥친다. 사랑의 주파수에 맞추어진 세상은 지금 같은 에너지의 흐름 속에 있다.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강, 산, 기차, 숲, 방, 할머니, 심부름하는 놈, 봄베이, 뉴욕, 먼 날 등을 사랑의 장(場)으로 연결한다. 끊어짐을 뜻하는 ‘간단’(間斷)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양한 존재와 공간, 시간을 차별 없이 연결하는 ‘사랑의 운동’의 현장이 여기에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38
눈/김수영
눈을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은 ‘눈’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세 편의 시를 썼다. 시기를 달리하면서 같은 제목의 시를 여러 편 썼다는 것은 김수영이 ‘눈’에 관심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956년에 창작된 「눈」은 김수영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는 ‘눈’과 ‘기침’이다. 1연의 도입부에서 시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눈’을 살아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떨어지는’이 아니라 ‘떨어진’이니 시인이 목격한 것은 마당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인 눈일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눈이 고결한 이유는 하늘이라는 권좌를 포기하고 기꺼이 더러워질 지상에 내려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이야말로 세상 모든 것들을, 심지어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마저 평등하게 뒤덮어 하얗게 만들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 깨끗하다, 아름답다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시인은 ‘살아 있다’라는 느낌을 받은 듯하다. 여기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생명이라는 의미이며, 이 표현은 동시에 살아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2연에 암시되어 있다.
2연은 젊은 시인에게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라는 권유가 내용의 전부이다. 이 시의 핵심 시어인 ‘기침’은 생명과 자유의 행동을 뜻한다. 이 기침의 행위 주체가 ‘시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시인에게 ‘기침’이란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유의 시를 쓰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젊은 시인’과 ‘눈’ 모두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상에 도달한 존재들이지만, ‘눈’은 살아 있는 반면 ‘젊은 시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이 시 전체에서 살아 있음과 죽음이 반복적으로 대비되고 있는 것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김수영은 불행한 시대 앞에서 잔뜩 움츠린 채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젊은 시인들에게 ‘자유’를 노래하라고, 그렇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강변하려는 듯하다.
그런데 왜 하필 시인은 ‘젊은 시인’에게 “눈 위에 대고”, “눈더러 보라고” ‘기침’을 하라고 했을까? 심지어 4연에서는 ‘가래’를 뱉으라고 말하지 않는가? 흔히 침이나 가래를 뱉는 것은 대상을 혐오할 때 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시에서의 ‘눈’이 세상의 진짜 모습을 은폐하는 거짓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3연의 핵심적인 표현인 ‘눈’이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살아 있다는 진술에서도 동일하게 제기된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살고 있는 시인 자신, 그리고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을 가리킨다. 시인에게 죽음을 잊는다는 것은 타락한다는 것, 현실과 타협한다는 것을 뜻한다.
4연에서 시인은 다시 “기침을 하자”라는 진술을 반복한다. 그 기침은 ‘눈’을 바라보며 행해져야 하는 존재감 확인의 행위이다. 그런데 ‘기침’이 세상을 향한 자유의 외침이라면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현실이 억압적일수록 ‘기침’을 함으로써 존재감을 증명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시인은 ‘기침’을 할 수 없다면 “가래라도/마음껏 뱉”으라고, 뱉자고 제안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눈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2013. 11., 고봉준, 정선태, 위키미디어 커먼즈)
내가 읽은 좋은 시39
푸르른 날/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서정주(1915~2000) '푸르른 날' 전문
가을이 오고 있는 9월이다. 맑고 깨끗한 고국의 하늘은 너무 눈이 부셔서, 외국에 오래 나가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눈물겨운 계절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나는 '저기 저기 저'하는 말도 안 되는 말, 가을 풍경에 얼이 빠진 시인의 당황이 그렇게도 좋다. 미당의 고향마을의 발음으로 다시 한번 외워 본다. 과연 그는 시인이다.
[출처][서정주] 푸르른 날|작성자여름개굴
내가 읽은 좋은 시40
귀촉도/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 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은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서정주는 1933년부터 시를 발표하였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벌였다. ‘시인부락’ 동인지에서 여러 작품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그의 두 번째 시집 ‘귀촉도’는 초기의 관능적인 세계를 벗어나 동양적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고 있다. ‘귀촉도'는 촉나라 망제가 죽어서 되었다는 귀촉도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였다. 다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사무치는 그리움, 생명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 등이 비극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제 피에 취한 새’인 ‘귀촉도’는 님의 표상이자 님과 나를 연결 시켜주는 사랑의 매체로 볼 수 있고 애절한 한의 객관적 상관물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41
화사/서정주
사향(麝香) 박하 (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출처]시삼백 643.화사_서정주|작성자맨달권정무
먼저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가 되는 '화사'는 꽃뱀을 뜻한다. 흔히 뱀은 그 징그럽고 꿈틀거리는 생김새로 인해 '악(惡)'을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는 여기에 '꽃'이 결합된 꽃뱀이므로 뱀의 일반적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화사'는 표면적으로는 꽃처럼 아름다운 빛깔과 무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징그럽고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양면성의 존재, 모순의 존재인 것이다. 이 작품은 얼핏 보아서는 구약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혹의 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여기서는 뱀을 원시적 생명의 대상 소재로 하여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원초적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추구하고 있으며, 때묻지 않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고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42
귀천/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당시 천상병 시인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과 정신이 많이 상했다. 불임이 되고 이가 많이 빠져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신체적 고통을 겪었으며, 정신 착란 등으로 괴로워 하여 음주 없이는 잠도 못 이루는 지경이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 쓴 시가 바로 '귀천'이었다.
그 때문에 언뜻 천상병 시인이 죽기 직전 유언 비슷하게 남긴 작품으로 오해 받기도 하는 시지만, 천상병 시인은 이 시를 발표한 뒤 23년이 지난 1993년에 사망했으니 유작은 아니다. 사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천상병 시인은 항상 술에 취해 지냈는데다 이가 빠져 발음도 어눌했던 탓에 정신병자로 오인 받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 하지만 주변인들은 천상병 시인이 군부에 의해 결국 의문사 당한 것이라고 오해하여 천상병 시인의 미발표 시들을 모아 유고집으로 '새'라는 시집을 냈다. '귀천'도 이 '새'라는 시집에 실린 작품 중 하나였다.
내가 읽은 좋은 시43
눈물/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나는 내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고, 그러한 심정으로 썼다. ‘인간이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서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라는 것이 이 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눈물을 좋아하는 나의 타고난 기질에도 잘 맞는다.
이 시는 사랑하던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품을 기독교 신앙으로 승화시켜 쓴 작품이다. 비애의 감정이 지나치면 사람들은 그냥 거기에 주저앉아 절망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눈물’을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라 했다. 새로운 생명을 싹틔울 씨앗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후반부의 ‘열매’를 예비하고 있다.
화자는 「슬픔을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케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또 화자는 종교적 경지에서, ‘웃음’이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이라면, ‘눈물’은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신의 은총과 같은 ‘열매’라고 여김으로써 슬픔을 극복해 내고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44
농무/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 시인은 이러한 즐거운 소재를 시상으로 삼아 역설적으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점점 황폐화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곳곳에서 즐거워하는 시구가 나오지만 그 주변 시구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화자가 농촌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시이다. 마지막에 농무를 춤으로 인하여 한과 울분이 신명으로 승화 되는 시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청각적 심상과 시각적 심상을 이용하여 시의 분위기를 알려 주는 대목. 여기서 막이 내렸다는 시 내용을 고려 해 보았을때 농촌사회가 막이 내렸다 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가설 무대란 임시로 만들어진 무대인데, 쉽게 해체가 가능하다.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텅빈 운동장은 공허감과 소외감을 상징,또한 농무는 원래 다같이 즐기는 농촌의 축제와도 같은 것인데 이젠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 했다는 것을 구경꾼이라는 시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음.
분이 얼룩진 얼굴: (1) 농무 분장이 얼룩짐 , (2) 분한 마음이 얼룩짐 <중의적 표현>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쪼무래기들은 젊은 일꾼들이 떠나고 남은 농촌 사람들을 의미한다.
꺽정이=임꺽정, 시적화자를 대변, 감정이입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농촌이 붕괴하는 상황을 반어적으로 표현, 신명이 날리가 없기 때문에 역설적 상황을 사용함.
내가 읽은 좋은 시45
풀/김종해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시를 쓰면서 그가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김수영의 「풀」을 생각하며, 시인이 이 「풀」과의 거리를 어떻게 의식하며 자신의 ‘풀’을 노래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김수영의 ‘풀’은 민중적인, 서민적인 전통적인 의미를 내장하면서도 그보다는 훨씬 더 바람과 풀의 존재론적인 호응과 존재론적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김종해 시인의 ‘풀’이라고 할 「풀 앞에 서서」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이, ‘나’ 자신이 ‘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 자신 또한 ‘풀’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필생畢生으로 온몸을’ 펴는, ‘풀’과 같은 존재, 바로 그것이다. ‘필생’을 ‘서울’의, “현실”의 어둠에 맞서 거세게 헤쳐나오며, ‘항해’를 하며 살아온 그였건만, ‘나이 팔순’에 다다라 보니 이제 ‘풀’이 보이고 ‘풀’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보인다. ‘말’을 버린 ‘풀’의 ‘일생’이 보인다. 침묵 속에서 ‘흔들리는’ ‘풀’처럼 ‘나’ 또한 ‘말’을 잊고 하나의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내가 읽은 좋은 시46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간행한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의 표제작이다. 강은교의 시세계에서 볼 수 있는 초기의 허무주의적 경향은 1980년대 이후 일상적 삶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보다 긍정적인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로 전환한다. 이 작품은 이같은 시적 변화의 과정을 통해 도달하고 있는 너그럽고도 포근한 정서를 기반으로 삶에 대한 사랑의 깊은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연부터 제2연까지는 물이라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들의 만남을 희구한다. 여기서 물은 생명이며 축복이다.
죽은 나무를 적시며 강물을 이루고 바다로 나가는 물이 된다는 것은 생의 궁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연에서는 시상이 전환된다. 여기서는 물의 화해로움과 사랑의 의미 대신에 불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현실적인 투쟁적 만남이 문제시된다. 불은 파괴이며 징벌이며 죽음이다. 불의 만남은 열정적인 승화라기보다는 생명이 없는 숯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제4연에서 불의 고통과 번뇌와 파괴와 죽음을 모두 넘어선 다음에 다시 물로 만나기를 희구한다. 이것은 삶에 대한 긍정이면서 동시에 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가 물이 되어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내가 읽은 좋은 시47
죽편1/서정춘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죽편·1 -여행’ 서정춘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누구든 이 푸른 기차를 타기만 하면 멀다. 갓 태어난 아기든, 스무 살 청년이든, 오십 줄 중년이든, 구순 노인이든, 무조건 멀다. 저마다 타고 있는 칸이 다르고, 출발한 시각이 다르지만, 이 기차를 타는 순간 모든 승객은 도착할 역이 아직 멀다. 칸칸마다 깊은 밤은 좀처럼 새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라도 꿈꾸는 데 조급할 이유가 없다. 대나무는 백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자기 삶의 정점에서 죽는다. 대나무에게 죽음은 추락이 아니라 상승이다. 반칠환 [시인]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작자의 두 번째 시집인 『남해금산』은 서사구조를 가진 시집으로, 치욕스런 삶을 사는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시집에서 작자가 말하는 치욕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다음의 시를 보면 그 불분명한 치욕의 정황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하는 대신 무릎으로 기어 먼 길을 갔다 (중략)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그때부터 사람이 사람을 만나 개울음 소리를 질렀다//그리고 다시 안개는 사람들을 안방으로 몰아넣었다 소곤소곤 그들은 이야기했다(중략)//아, 이곳에 오래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에서). 이 시를 통해 볼 때 ‘치욕의 사건’은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입에 담지 못할 일’이라고 할 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치욕의 흔적은 「치욕에 대하여」,「자주 조상들은 울고 있었다」,「아득한 것이 빗방울로」,「 치욕의 끝」,「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등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치욕의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은 모성이다. 작자는 모성을 통해 치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랑하는 어머니/당신의 이름을 힘겹게 부를 때마다/임종의 괴로움을 홀로 누리시는 어머니,//불러 주소서/그 눈짓, 그 음성으로/죄의 한 아이를......’(「성모성월(聖母聖月) 1」에서). 이 시에서 작자는 모성의 전형인 성모마리아를 향해 죄인인 자신을 사랑으로 불러 달라고 기도한다. 치욕과 고통의 삶이 모성을 통해 구원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성과의 합일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작자의 의식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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