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많이 읽히는 시

많이 읽히는 시//내가 읽은 좋은시)1

월정月靜 강대실 2024. 5. 23. 16:15

내가 읽은 좋은 시1
 
꽃//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작품은 전집에서 보면 <꽃의 소묘>와 <꽃을 위한 서시> 등과 함께 ‘꽃의 소묘’부에 실려 있다. 꽃을 소재로 한 시편들의 대부분이 정감과 영탄조로 되어 있는 데 반해서 김춘수의 <꽃>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러한 상식적이고 일반화된 통념에서의 발상법을 전면 거부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한 첫 머리부터 특이한 발상법임을 직감하게 한다. ‘나’와 ‘그’, 즉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의미부여가 있기 전에는 ‘꽃’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2연에 이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로 된다. 작자는 여기서 ‘꽃’이라는 사물을 대상화하여 관조하고 있다. 꽃을 꽃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깊이의 시학(詩學)을 우리는 여기서 읽을 수가 있다. 꽃을 정감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물화하여 존재의 깊이를 관찰한다. 즉, ‘꽃’이라는 사물을 상대적 대응체로 대상화하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3연의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에서 ‘우리들’ 속에는 시적 자아인 ‘나’뿐 아니라, ‘꽃’인 ‘그’도 포함된다. 사물과 인간 그 모두가 의미 있는 무엇이 되고 싶은데 그것이 바로 ‘꽃’이라는 것이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꽃’이 되고 싶고, 그 꽃으로 하여금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완미한 존재로 있고 싶어 한다.

이것은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微笑)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고 한 <꽃1>(1955)에 이르러 더욱 확연해지며, 온갖 고뇌와 갈등을 해소하고 맑고 고요한 하늘에 잔잔한 물살처럼 퍼지는 화해의 미소를 짓는 고도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내가 읽은 좋은 시2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바람' 등의 자연물을 통해 지은이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별은 천상세계에 속하고 바람은 지상세계에 있는데, 시 마지막에 가서 별이 바람에 스치는 것은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바람'은 시인의 불안과 고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실제로 시인의 생애를 살펴보면,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하숙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 등으로 무척 괴로워했다.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괴로워했다'이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의 결벽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도 윤동주는 결벽성이 있었다.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지 않았고,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는 과정에서 시어 한 구절 때문에 몇 달씩 고민한 적이 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은 내가 걸어갈 길로, 인생, 운명, 미래의 소명을 가리킨다.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성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시인이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을 알면 구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어구는 소명을 받은 자임을 드러내는 기독교적 메타포를 사용한 것이고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이라는 어구는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를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윤동주는 남을 헐뜯는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시인의 기독교적 메타포는 십자가(윤동주)를 비롯한 여러 시에서 드러나며 특히 속죄양 모티브를 가장 많이 인용한다.
 
 

내가 읽은 좋은 시3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시의 구성은 1~8행까지의 처음, 9∼23행까지의 중간, 24∼32행까지의 끝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에서는 박시봉의 집에 들기까지의 방황의 과정을, 중간 부분에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느낀 슬픔과 절망감을, 끝 부분에서는 현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각성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에 가까운데, 가족과 떨어져서 객지의 낯선 방에 칩거한 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슬프고 부끄러운 과거의 삶을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크고 높은 것”의 존재를 깨닫고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 과정이 잘 드러난다. 시의 끝부분에서는 ‘갈매나무’를 통해 “드물고 굳고 정한” 존재를 향한 자아의 이상을 투사한다.
이 시에서는 유장한 호흡과 잦은 쉼표로 내면의 진솔한 고백을 담아낸다. 내면의 독백이 사실적으로 전달되는 이 시의 산문적 어조는 압축과 절제의 방식보다 화자의 회한과 숙고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러한 어조로 인해 이 시의 진정성은 더욱 부각된다.
이 시의 독특한 개성을 이루는 갈매나무의 상징은 산문적 진술만으로 획득하기 힘든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아름답고 고고한 갈매나무에서 오랜 번뇌의 끝에 집착에서 벗어나 새롭게 각성된 시인의 자아를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민족의 고난과 함께 하는 유랑생활의 비애를 그리면서도 숭고하고 강한 의지를 지향하는 고매한 정신을 제시하여 한국시의 수준을 드높이 끌어올린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가 읽은 좋은 시4
 
자화상/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애비는 종이었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등 이 시의 화자가 상당히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이러한 자신의 불행하고 가난하던 자신의 삶을 당당히 고백하고 이에 대해 당당히 맞서려는 의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1연 맨 마지막 시구에서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라는 시구는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해 사회의 부정의에 항거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이 닮았다 하면서 자신 역시 그러한 성향을 가졌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

시의 내용이 암울하나 시의 어조 역시 단정적이어서 이를 이겨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5
                 
낙화/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 시는 꽃이 떨어지는 현상을 인생의 문제와 연결한 작품입니다. 꽃이 떨어지는 현상 그 자체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슬픈 일이지요. 그러나 꽃이 떨어지고 나야 여름에 녹음이 무성해지고 가을에 열매도 맺히기 때문에, 낙화는 더 큰 결실을 위해 요구되는 슬프지만 의미있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를 인생의 문제에 적용해 보면 청춘의 소멸이나 결별에 대한 새로운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낙화와 같은 결별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성숙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시에서처럼 자연 현상인 낙화, 그리고 그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청춘의 소멸이나 결별을 아름답다고, 또는 축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읽은 좋은 시6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1]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은 님이 떠나 버린 슬픔을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듯한, 또는 혼자서 독백을 하는 듯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윤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님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경어체를 사용하여 내용을 더욱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님의 침묵》에서 "노래"와 "침묵"은 화자와 "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시어이다. 한용운은 시 《반비례》에서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에요"라고 했다. 침묵이라는 부재의 상태에서 "님"의 실재를 본 것이다. 화자는 "님"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데, 시 《나의 노래》에서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안다고 했다. 이는 화자가 자신의 노래에 "님"과 근원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7
 
동천/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출처]
동천 _ 서정주 (참나무공화국) | 작성자 참나무
 
이 시기는 작가의 초기 시에 보이던 생명력에 대한 갈구나 병적인 징후가 『귀촉도(歸蜀途)』와 『신라초(新羅抄)』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어느 정도 사라지고, 동양적 체념과 안식의 자세를 취하며 마음의 평정을 도모하던 때이다. 서정주 시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는 사상적 원숙미와 시적 구성력이 가장 고조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천』에 실린 작품들이 불교의 인연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신라초』의 연장선상에 놓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불교적 설화조의 바탕에 짙은 유미주의적 인식이 착색되어 있음을 그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설화조의 시들이 긴장감 어린 압축미보다는 이야기와 결부된 사색의 깊이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산문적 서술시와는 달리 짤막한 단시의 형식을 통하여 한순간의 정신의 긴장과 감정의 응축을 포착하고자 한 작품들도 많이 보인다. 이 시기의 그러한 성향을 대표하는 시가 바로 「동천」인 것이다.
이 시는 전부 5행으로 되어 있으며 각 시행은 7 · 5조를 기반으로 한 3음보의 율격 구조를 가진 것으로 율독(律讀)이 가능하다. 그만큼 이 시에는 우리 고유의 민요나 시조 같은 전통적 시가 형식과의 상관성이 짙게 나타낸다. 그것은 곧 이 시의 근저에 동양적 형식미와 정신세계가 잠겨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해석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은 님의 눈썹과 새의 관계이다. 겨울 하늘의 투명하고 삽상한 공간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님의 눈썹을 천(千)날 밤의 꿈으로 씻어서 걸어 놓았다고 진술한다. 그랬더니 추운 겨울밤을 나는 새도 자신의 지극한 정성을 알아보았는지 그 눈썹의 모양과 비슷한 모습으로 피해가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정신과 정신의 마주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간절함은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는 겨울새에게까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불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이 짧은 시 한편에도 시인의 불교적 사유가 은밀히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작가의 말(「내 연정의 시 '동천'과 윌리엄 포크너의 인연」, 『문학적 자서전』, 은행나무, 2016.)에 의하면 이 작품은 한 여대생 제자를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작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천 [冬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가 읽은 좋은 시8
 
진달래꽃/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
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이 지은 시. 1925년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한 시집 ≪진달래꽃≫에 실려 있다.
총 4연, 각 연 3행의 짧은 서정시로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의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을 담뿍 뿌리겠다는 것이 그 간추린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 떠나가는 님은 다시 돌아올 기약조차 없다. 오직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그런 기대감을 갖고 보내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사람의 사무친 정(情)과 한(恨), 동양적인 체념과 운명관에서 빚어내는 아름답고 처절한 사람의 자기 희생적이고 이타적(利他的)인 인고(忍苦)의 마음이 이 이상 더 깊고 맵고 서럽게 표현될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라고 박두진(朴斗鎭)은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산유화 山有花>와 함께 소월의 대표작의 하나로 우리 근대시사에서 기념비가 되고 있다. 혹자는 이 시에서 떠나는 님의 실제 모델을 제시하고도 있지만, 그 모델의 사실 여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떠나는 님을 억지로 붙잡아 두지 못하고 보내는 한 여인의 심정을 이만큼 완벽하게 시적으로 형상화한 데 있다.
이런 이별의 보편적 정서는 <가시리>나 <서경별곡 西京別曲> 등과 같은 고시가나 민요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의 해석에서 ‘나보기가 역겨워/가실때에는’의 반복구에 나타난 역설적(逆說的) 의미의 추구에만 집중되어 왔을 뿐이며, ‘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에 대해서는 유념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작자가 굳이 ‘영변에 약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의 해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변의 약산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한다. 이 시의 제작 과정에서 이런 시적 배경을 설정한데 작자의 의도가 없었다면, 굳이 그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영변의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을 이끌어 왔을 까닭이 없다.
영변의 약산동대는 서관(西關)의 명승지로서, 그곳을 둘러싼 많은 전설과 민요가 전해지고 있다. 봄이 되면 온통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진달래가 꽃밭을 이루고 있는 약산, 그 서쪽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구룡강(九龍江) 푸른 물이 산록(山麓)을 흐르고 있다. 옛날 어떤 수령(守領)의 외딸이 약산에 찾아왔다가 그 강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그 죽은 넋이 진달래가 되어 약산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소월도 약산동대에 얽힌 이런 전설과 민요를 알고 있었고, 특히 수령의 죽은 외딸의 넋이 진달래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의식하고 이 시를 썼을 것이라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마디로 이 시에서 소월이 떠나는 님을 붙잡지 않고 꽃을 뿌리며 보내겠다고 함으로써 보내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결코 울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슬픔과 원망이 사무쳐 있다는 것으로, 꽃을 뿌리며 ‘님’을 보냈듯이, 곧바로 되돌아올 것을 바라는 작자의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달래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가 읽은 좋은 시9
 
풀/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金洙暎)이 지은 시. 작자의 말기를 대표하는 시작품으로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쓴 것이다. 318행으로 된 이 작품은 바람이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다.
‘풀’과 ‘바람’의 반복적인 구조와 효음(效音)을 제외하고 문맥상으로는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받지 못한다. 단순히 ‘눕다’·‘일어나다’·‘울다’·‘웃다’라는 4개의 동사가 반복되어 시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시의 핵심어인 ‘풀’과 ‘바람’의 상징성의 해석에 대하여 어떤 이는 ‘풀’을 가난하고 억눌려 사는 민중의 상징이고, ‘바람’은 민중을 억누르는 지배세력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를 부정하고 포괄적으로 생(生)의 깊이와 관련된 어떠한 감동을 맛보게 하는 상징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자인 김수영의 강렬한 현실의식과 저항정신이 뿌리 박힌 참여파 시인의 전위적(前衛的) 역할을 감안하여 보면, 오히려 전자의 해석이 온당할 것 같다. 처음에는 바람에 의하여 풀이 누웠다가 일어나지만, 나중에는 바람보다 먼저 풀이 누웠다가 일어나는 현상을 볼 수가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에서는 ‘풀’이 눕고 울다가 또 눕는 것은 흐린 날 비를 몰아오는 ‘바람’ 때문이라 하고 있다. 어두운 현실에서 억눌리며 사는 민중의 삶을 ‘풀’에다 비유한 것이다.
둘째 연에서는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고 울고 일어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바, 이는 지배세력에 눌려 사는 민중의 굴욕적인 삶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셋째 연에서도 날은 흐리고 ‘풀’이 눕고 일어나고 웃고 우는 것이 바람과는 무관하게 엇갈린 모순율(矛盾律)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풀’이 발밑까지 눕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이 발밑까지 짓밟힌다는 것으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풀’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노래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가 읽은 좋은 시10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의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 작품의 배경은 평범한 한 농촌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얼룩배기(현 표준어: 얼룩빼기) 황소가 울음을 우는 풍경으로서의 한국적인 농촌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 다시 가족사적인 그리움이 결합된다. 겨울밤에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우어 괴시는 정겨운 모습이 다가오는 것이다.
아울러 ‘질화로, 재, 뷔인 밭, 밤바람 소리’ 등의 소재가 유년의 회상을 강하게 환기시켜주는 촉매가 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로서의 소년시절이 아프게 떠오른다. 이 소년시절이란 흙과 하늘의 대조 속에서 ‘화살을 쏘는’ 상징적인 행위로 요약된다. 그것은 꿈 많던 시절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기만 하던 비상의지의 발현이며, 이상을 향한 몸부림을 반영한다.
여기에 다시 가족사적인 풍정이 연결된다. ‘누이’와 ‘안해’에 대한 그리움이 그것이다. 누이와 아내는 둘 다 그리움의 표상이자 모성적인 따뜻함과 편안함을 일깨워주는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재와 연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드러나는 ‘석근 별, 모래성, 서리 까마귀,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 등의 대응 속에는 이제 추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비애감이 담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낙원에 대한 지향을 시로 표현한 「향수」는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향수 [鄕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가 읽은 좋은 시11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특히 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그가 지닌 삶에의 애잔한 슬픔, 그리고 정한(情恨)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해질녘 언덕에 올라앉아 저녁노을에 물드는 강을 바라보면, 마치 그 강은 노을빛으로 인하여 붉게 타는 듯이, 아니 붉은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더구나 서러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바라보면, 마치 내 설움이, 내 울음이 붉게 타는 듯이 보인다.

젊은 시절, 많고 많은 삶의 애환(哀歡)을 그 젊음과 함께 가슴에 안고 우리는 살아왔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마저도, 마치 나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인 양, 절절하게 듣던, 그 가슴 저리던 순수했던 젊은 시절. 언덕에서 바라보던 가을 강이, 마치 노을에 물들어 우리의 서러운 가슴 마냥 붉은 울음을 터트리며 흐르고 있었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그 기쁜 첫사랑의 산골 물소리 같은 도란거림도 사라져버렸고, 처연한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모두 녹아난, 그리하여 살면서 겪어온 모든 아픔, 기쁨, 아쉬움, 연연함까지도 모두 모두 안으로 안으로만 끌어안은 채, 다만 묵묵히 흐르고 있는 가을 강. 그 가을 강 같이 우리들 가슴 속 깊이 소리 죽여 흐르는, 붉게 물든 한(恨), 한(恨)만을 우리는 오늘 이렇듯 만나고 있을 뿐이로구나.

출처 : 천지일보(
https://www.newscj.com)
 
 
 

내가 읽은 좋은 시1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푹푹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눈이 푹푹 쌓이는 밤
나타샤와 나는 흰당나귀 를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없다
아니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얘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이국 정취를 풍기고 있어서 백석의 시로서는 다소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기행체험의 시에 해당하지는 않더라도 그간 지나칠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여 왔던 우리의 토속적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도피적인 유랑 의식과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후기시에 속한다.

우선 화자인 ‘나’의 처지가 가난하고 쓸쓸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 화자는 ‘나타샤’를 사랑하지만,현실 세계에서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자는 현실을 떠나 깊은 산골로 가기를 원하고있다.
그러한 현실 도피를 일러 화자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현실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현실을 능동적으로 버리는 행위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화자의 인식에서부터
시대적 아픔과 고민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시인의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치열한 현실 인식이 나타나 있지 않아 아쉬움을 주지만,
인간 모두의 마음 속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사랑에의 환상적인 꿈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서정시의 한 진경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