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13
북치는 소년/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세 개의 연이 모두 ‘∼처럼’으로 끝났다. 시 본문만으로는 내용이 애매하다. 팁이 있기는 하다. 제목 ‘북치는 소년’을 맨 끝으로 가져오면 시가 새벽빛처럼 밝아온다. 그렇더라도 아직 명확하지는 않다.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이라니…. 이 말에는 빈 공간이 있다. 그러나 비어 있는 그 자체로 완성이다. 어쭙잖은 설명으로 그 공간에 개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시에서 ‘무의미’를 이야기한 사람은 김춘수(1922∼2004) 시인이다. 사물을 보는 고정관념을 해체시키고 사물 그 자체가 지닌 ‘순수’를 보려고 했었다. 그 무의미가 이 시처럼 잘 어울리는 작품도 드물다. 이제 우리는 가난하지 않고, 서양나라에서 온 크리스마스카드보다 아름다운 카드도 상점에 가득하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별빛을 그리며 북을 두드리는 양치기 소년이 드문 세상이다. 그러니 얼마나 투명한 아름다움인가. 벌판에서 북을 치는 아이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 속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는 오고 있다.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618291&code=11171345
내가 읽은 좋은 시14
나그네/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작자는 이 시의 주제적 모티프(motif)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 제목이 다 주제적 모티프가 되는 ‘나그네’는 바람과 함께 떠도는 절망과 체념의 모습이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떠도는,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허전해진 모습을 ‘나그네’에서 상기할 수가 있다.
제1연의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은 작자가 태어나서 자란 농촌 풍경이나, 우리 모두가 보아온 보편화된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을 찾아들거나 떠나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은 ‘구름에 달가듯이’ 간다. 이 때 ‘달’의 발걸음은 반드시 밝고 경쾌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외롭고 쓸쓸하고 애상적이기까지 하다.
제3연의 “길은 외줄기 남도삼백리”에서 ‘삼백리’는 처음에 ‘팔백리’로 되어 있었는데, 발표할 당시 고쳤다고 한다. 작자의 “서러운 정서가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리”가 ‘삼백리’라는 것이다. 제4연은 조지훈의 「완화삼」에서 따온 것으로, 붉게 타는 저녁노을을 술빛에 비유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그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가 읽은 좋은 시15
빈 집/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출처]좋아하는 시 - 기형도 <빈 집>|작성자다온단열
화자는 사랑했던 순간의 대상을 하나하나 부르며 사랑했던 당시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잘가'를 반복하면서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잘가'라는 표현 속에는 사랑의 추억이 온전하길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은 화자는 세상의 빛을 잃은 장님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사랑의 대상을 빈집에 넣어두고 마지막 문을 닫습니다. 빈집은 사랑의 추억과 열망을 잃은 화자의 공허한 내면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여기에 사랑을 가두고 문을 닫는 장면은 슬픔을 배가시킵니다.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랑은 빈집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화자의 마음도 공허한 빈집 같습니다. 사랑을 잃은 화자의 외로움이 짙게 느껴집니다. 빈집은 이 시는 사랑의 상실을 노래합니다. 사랑으로 인해 밤은 짧았고 짧은 밤 내내 겨울 안개처럼 창밖을 떠돌거나 촛불 아래 하얀 종이를 펼쳐놓은 채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열망'이 됐을 것입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사랑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사랑을 보낸 집은 집이 아닙니다.
빈집도 빈 몸도 빈 마음입니다. 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긴 하지만 '문을 닫는다'는 것은 '내 사랑'이라 불리는 소중한 것들을 가두는 것이고,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잠김이자 감금일 것입니다. 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 '빈집'이나 다름없고, 그 빈집이 관을 연상케 하는 이유입니다. 삶에 대한 격렬한 열망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상실은 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요. 어떤 가슴엔 시가 꽃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읽은 좋은 시16
사평역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연 27행의 자유시이다. 1981년『중앙일보(中央日報)』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로서 1983년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첫 시집『사평역(沙平驛)에서』에 실렸다. 80년대 이후 대표적인 서정시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임철우(林哲佑)가 『사평역』이라는 이름으로 소설로 꾸미기도 했다.
이 시의 표제인 ‘사평역’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체험했던 남광주역과 남도의 회진포구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평역은 가상의 공간이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이 군부의 총칼에 무참히 짓밟혔던 암울한 현대사의 질곡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시공간의 동일성과 공감각적 이미지의 다발을 통해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를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시간은 멈춘 듯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대합실 밖에는 밤새 눈이 내리고 톱밥난로가 지펴진 대합실 안쪽에서는 시인과 더불어 삶의 지친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 정지된 장면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내장하고 있는 연속체이다. 과거는 슬픔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통곡하며 배설하는 설움이 아니다. 침묵 속에 깊게 그러나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을 붙들고 있다. 이 장면 속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슬픔의 도가니이다. 드러나지 않지만 미래는 그리움을 내장하고 있다. 한 줌의 눈물을 톱밥난로 불빛 속에 던져주는 행위에서 그리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구체화된다. 미래는 그 그리움의 힘으로 살아야함을 시인은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합실을 뒤덮은 흰 눈과 청색의 손바닥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슬픔의 증류과정을 거쳐 동질화된다. 청색이 새파랗게 질린 민중의 시련과 고통을 알레고리하고 있는 반면 흰 눈은 화해와 용서를 위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눈꽃의 화음’ 속에 사평역으로 환치된 역사의 현장은 침묵 속에 갇힌 듯하다. 그처럼 역사는 이미 자정이라는 심판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섰다. 시인은 이 지점에서 죽어간 모든 생명들을 부활시키고 있다.
이 시는 현실적 상상력을 낭만적 상상력으로 자연스럽게 변주시킴으로써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를 보였다는 데 의의를 지닌다. 진술과 토로로 일관하는 교술적 메시지에 의지하지 않고 휴머니즘의 든든한 바탕위에서 역사를 시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17
초혼 /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 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 이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출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민예원
초혼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일이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면 망자의 체취가 스며든 옷가지를 들고 기와지붕에 올라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제발 돌아와 주기를 갈망한다. 사랑하고 의지하며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지만 어찌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았을까. 아껴 둔 말도 있을 것이고 미처 못 다한 말도 있으리라. 함께 하고 싶은 일도 있었을 것이고 미래의 고운 청사진도 같이 그리기도 했으리라. 그런 사람이 예기치 못한 시간에 홀로 훌쩍 떠나간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애달프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닌가. 그 심중을 그 누가 다 헤아려주랴. 먼저 간 사람도 모를 것이고 주위에 있는 사람도 모르리라. 다만 혼자 몸부림치면서 애달프게 울부짖는 시인의 모습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오죽하면 부르다가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싶고 부르다가 죽고 싶은 마음이 들까.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그 어느 상실감 보다 크리라. 같이 갈 수 없는 길이기에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애타게 불러 보는 것이리라. 서산에 걸린 붉은 해도 슬퍼서 눈시울을 붉히고 사슴의 무리까지 슬픔에 젖어 울어주며 동참해 주는듯하다. 그러니 시인의 슬픔이 내게로 다가와 모든 아픔을 녹아내리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다. 우리나라 서정시의 백미라 할 소월 시를 음미하노라면 한의 설움이 알알이 맺혀있음을 본다. 하여 가슴 아픈 이들이 같이 슬퍼하고 함께 울면서 애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설로 부르다가 죽고 싶은 이름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내가 읽은 좋은 시18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金永郎)의 대표적인 시.
이 작품은 12행시로 4행시를 즐겨 쓰던 저자로서는 새로운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모란이 떨어져버린 뒤의 '절망감'이라는 이중적 갈등을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다림이 무산되어버리는 순간 다가오는 절망감을 시인은 '설움'의 감정 속에 농축시키고 있는데, 마지막 행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겠다는 화자의 의지는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이 시는 '찬란함'과 '슬픔'을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의 '모란'은 단지 객관적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과 합일되어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모란의 빛깔이나 향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란을 독자의 마음에 효과적으로 살아있게 만든다. 모란이 또한 직유나 은유의 도움 없이 모란에 대한 '기다림'을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모란과 화자가 혼연일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 모란의 모습이나 향기,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정서적 무게는 물론 화창한 봄의 찬란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모란에 무르녹아 있는 설움과 기다림의 정서를 감지할 때 이 시가 '봄'과 '모란'을 노래한 절창(絶唱)의 작품임을 인식하게 된다.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 서정시의 원리를 극대화시킨 작품으로 널리 애송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란이 피기까지는 (국어국문학자료사전,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내가 읽은 좋은 시19
국화 옆에서/서정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4연 13행의 자유시로 서정주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국화를 소재로 하여 계절적으로는 봄·여름·가을까지 걸쳐져 있다.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괴로움과 혼돈이 꽃피는 고요에로 거두어들여진 화해의 순간을 상징하는 꽃”이라고 한 어느 논자의 말과 같이, 이 시에서 ‘국화’의 상징성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봄부터 울어대는 소쩍새의 슬픈 울음도, 먹구름 속에서 울던 천둥소리도, 차가운 가을의 무서리도 모두가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시적 발상법은 작자 스스로 생명파로 자처하던 초기 사상과도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핵심부가 되는 3연에서 ‘국화’는 거울과 마주한 ‘누님’과 극적인 합일을 이룩한다. 작자는 여기서 갖은 풍상을 겪고 돌아온 안정된 한 중년 여성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이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영상(影像)”이 마련되기까지 시인은 오랜 방황과 번민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지난날을 자성(自省)하고 거울과 마주한 ‘누님’의 잔잔한 모습이 되어 나타난 ‘국화꽃’에서 우리는 서정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
작자는 이 시에서 한국 중년 여성의 안정미(安定美)를 표현했다고 하여 제3연의 ‘누님’이 그 주제적 모티프(motif)가 된다고 하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국화’의 상징성도 중요하다. 이 시에서 우리는 국화가 피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한 생명체의 신비성을 감득할 수가 있다. 찬 서리를 맞으면서 노랗게 피는 국화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표상되고 있다.
두 번째 시집 『귀촉도(歸蜀途)』(1948)에서 작자는 ‘동양적(東洋的) 귀의(歸依)’를 시도하였는데, 여기에 이르러 서정의 절정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변모 과정이 ‘관능과 육체에서 동양적 서정’이라는 직선적 변모가 아니라, 그 초기의 ‘감각적 경험의 모순과 갈등에서 화해로 지양되는 변증론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20
즐거운 편지/ 황동규
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Ⅱ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1958년 『현대문학』 11월호에 추천 등단작으로 발표된 황동규의 시 작품.
총 2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 간절하고도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고백적인 정서를 노래한 작품이다. 황동규의 초기 작품인 이 시는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인 18세 때 연상의 여성을 사모했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여러 영화의 모티프가 되는 등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는 시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인한 젊은 날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서정적인 어조로 형상화하여 낭만적이고 우수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1연에서는 간절한 자신의 사랑을 “사소한 일”이라고 함으로써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즉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이라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자신의 사랑은 ‘그대’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해 보이지만 실상은 늘 변함없이 ‘그대’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2연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반복적 표현을 통해 상대를 향한 시적 화자의 사랑이 매우 절실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으로 바꾸어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영원히 그리고 변함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다릴 것임을 말하고 있다. 기다림의 도중에 찾아오는 “밤”과 “골짜기”라는 시어가 상징하듯, 외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 오거나 자신의 사랑이 끝난다고 해도, 그대를 사랑했던 그 기다림의 자세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이 이어진다. “눈”, “꽃”, “낙엽”과 같은 계절의 변화처럼 다소 변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자연의 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과 같이 자신의 사랑과 기다림도 영원할 것이라는 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반어적 표현을 통한 정서 전달과, 자연 현상에 빗대어 사랑을 나타낸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산문시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시어의 반복과 완결된 문장 구조의 반복으로 자연스럽게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시는 일반적인 연시에서 보이는 임을 향한 일편단심의 전통적 정서를 뛰어 넘어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 기다림의 자세를 노래함으로써, 전형화되어 온 전통적 연애시의 계보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즐거운 편지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내가 읽은 좋은 시21
산유화/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山有花)는 산에서 피고 지는 모든 꽃을 의미하며, 이 작품에서는 홀로 외롭게 피고 지는 비극적 존재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산은 이러한 존재의 생멸이 순환되는, 근원적 고독감을 발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작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꽃이 피고 지는 일상적 자연 현상에서 착안하여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시는 고독하게 태어나고 고독하게 살다가 고독하게 돌아간다는, 탄생과 소멸의 순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단순히 꽃이 피고 지는 내용만을 쓴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진리를 담고 있다. 특히 '저만치'에 의미가 많이 담겨 있다.이 시에서 '꽃'이 존재라면 그 존재를 '저만치'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상과 너무 가까이 있어 빠져있을 땐 그 대상이 전부인 것 같고 너무 가까워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상대를 인식해야 비로소 진정 대상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또한 표현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현실에서 떨어져서 홀로 서 있는 꽃(소월), 고독을 이겨내야 하는 소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읽은 좋은 시22
별 헤는 밤/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네이버 지식백과] 별헤는밤 (공유마당)
1948년 정음사에서 간행된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마지막에 수록된 윤동주의 시 작품.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인 1941년 11월 5일에 졸업을 앞두고 쓴 시로, 가을밤을 배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시의 전반부에서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유년 시절을 회상하고 여러 상념에 젖어드는 심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자아의 현실적인 고뇌와 자아성찰,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산문적인 리듬을 구사하여 호흡의 변화를 가져오는 등 새로운 시도도 눈에 띄는 점이다.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하늘과 별이라는 소재는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적 공간과 순수한 이상에의 동경을 표현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적 역할을 하고 있다. 담담하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가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시적 화자는 가슴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상념들을 차분한 어조로 읊조리듯 전하고 있다. 그러다가 5연에서 줄글로 시행이 바뀌면서 호흡이 빨라지고, 이처럼 빠르게 시적 화자의 눈앞에 온갖 그리운 것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것은 화자가 잃어버린 추억이자 아름다웠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다.
그들과 멀리 떨어진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오면서 시적 화자는 우울하고 안타까운 현실에 괴로워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쓰고 흙으로 덮어버리는 행위에서는 자책감과 부끄러움이 동반된 자아성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그러나”라는 시어를 기점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생적인 자세를 다짐하고 있다. ‘봄’으로 형상화된 아름다운 미래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되는 날이며, 이를 위해서는 죽음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나아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적 모습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 역시 윤동주의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움과 자기 성찰, 부끄러움과 희생적 자세라는 주제를 근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별 헤는 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내가 읽은 좋은 시23
여승/백 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1]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193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한 여승의 비극적인 인생역정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해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가족공동체마저 해체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고발하고 있다.
전4연 12행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는 서정시로서, 역순행적(회상적) 구성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한 여인의 일생을 시의 제재로 삼아, 식민지시대의 사회적 현실을 애상적이며 감각적인 어조로 형상화한 사실주의적 시이다.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소설을 연상시키는 평서형 종결어미의 사용 및 전통적 율격의 접목으로 산문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객관적 서술법과 비유법을 통한 시상의 압축을 꼽을 수 있다.
제1연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에서 시인은 한 여승과의 오랜만의 해후를 이야기한다. 가지취의 내음새로 속세의 번뇌를 잊은 듯한 그 여승에게서 인생에 대한 서러움과 안쓰러움을 느낀다. 제2연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나는 파리한[2]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는 시인이 평안도의 어느 산속 금점판에서 옥수수를 팔던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파리한 안색의 그 여인은 우는 아이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아이를 때리면서 차갑게 울 수밖에 없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제3연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에서는 남편도 없이 유랑민이 되어 어린 딸을 데리고 힘겹게 살아가다가 결국 가난으로 인해 딸마저 잃게 된 여인의 힘겨운 삶을 이야기한다. 의지할 곳 없게 된 여인의 처량한 신세야말로, 1930년대의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던 우리민중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딸의 죽음을 돌무덤 주변의 도라지꽃으로 비유한 데에서 시인의 섬세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고/도라지꽃이 좋아/돌무덤으로 갔다 라고 표현한 데에서 운율이 잘 드러난다. 제4연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에서 한 많은 여인이 삭발하고 여승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여승은 비록 불교에 귀의했으나 아직도 현실적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글픈 모습이다.
내가 읽은 좋은 시24
유리창/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시의 주제가 죽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임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유리'는 표면적으로 시적화자가 머무는 공간인 '안'과 '밖'을 차단 하기도 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연결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집니다.실제로는 차단되어 있지만,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즉 '유리'는 화자가 살고 있는 이승과 죽은 자식이 있는 저승을 투영해주는 유일한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고 슬픈 것'은 화자의 입김을 표현한 것임과 동시에 차갑고 슬픈 것이라고 표현 했으므로, 죽은 아이의 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리창 앞에 화자는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분다고 했습니다.
열이 없이 서있는 이유는 아이를 잃은 상실감 때문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입김을 부니,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길이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고 했습니다.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창 밖의 길이 일렁거려 보이는 것이지요.그리고 그것을 길이 날개를 파닥거린다는 활유법을 사용하여, 살아있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이것을 통틀어 날아가는 새같은 죽은아이의 환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는 입김을 불고, 지우고 또 불어서 보는 모습입니다.이는 죽은 아이를 보고싶은 화자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새까만 밤'은 죽음의 세계를 의미하는데 입김을 불고 지우는 행동을 통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까만 밤에 떠오른 별을 '물먹은 별'이라고 표현했는데, '별'자체는 죽음의 세계에 떠있는 죽은 아이라고 유추할 수 있고, 이 별을 '물먹은 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화자의 눈에 눈물이 고여, 눈물어린 눈으로 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고 표현 한 것은, 보석만큼 죽은 아이가 소중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유리를 닦는 것은, '밖' 즉 '죽은 아이가 있는 저승의 세계'를 더 잘 보기 위한 화자의 행동입니다.이러한 화자의 행동을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고 표현 했습니다.이 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죠. 외로움과 황홀함은 서로 상반되는 정서입니다.하지만 화자는 이 두 정서를 함께 사용했네요. 이는 모순적인 것으로 역설법이라고 합니다.죽은 아이가 자신 곁에 없어서 외롭지만 유리창을 통해 아이의 환영이라도 보기를 기대할 수 있기에 황홀하기도 한 것입니다.
'폐혈관이 찟어진 채로' 에서 죽은 아이가 죽은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 바로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에 화자는 '아아,'라는 영탄법을 사용하여 극도의 슬픔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늬'는 죽은 아이를 지칭하는 시어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산 새'처럼 허망하게 날아갔다고 표현했습니다.
부모를 잃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그만큼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인데요.
정지용 시인은 '유리창'이라는 시에서 자식이 죽었다라는 말 한마디 없이, 절절한 아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제된 표현을 사용한 시라서 그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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