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25
광야//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1연
까마득한 옛날에 천지가 창조되어 하늘이 열렸고, 닭 우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인간 문명이 존재하기도 이전에 광야가 이미 있었음을, 광야의 근본성을 제시한다.
2연
바다를 연모해 휘달리는 산맥은 전설이나 신화 같은 존재들이자 광대한 자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강대한 초월의 존재들도 광야를 범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광야는 신성한 터전이다.
3연
끊임없는 광음이나, 계절이 피어서 진다는 건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뜻. 큰 강물이 길을 열었다는 건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소리.
4연
지금 눈이 내리고 있음은 일제에게 지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3연에 언급된 '피어선 지는' 계절이라는 표현을 통해 '지금'은 겨울이며, 섭리에 따라 다시 봄이 올 것임을 은유하였다. 매화 향기가 홀로 아득하다는 것은 일제에 억압받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선비 정신을 뜻하며, 화자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 미래(봄)의 광복의 희망을 표했다.
5연
미래를 나타내는 연으로서,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은 일제에 지배받는 상황에서 나타나 줄 구원자를 뜻한다.
사실 시의 내용은 모호하다. 그랬을 것이라는 어투로 명확하지 않다. 광야는 까마득한 과거부터 있었을 것이고 산맥들이 차마 범하지 못할 만큼 신성한 곳일 것이다. 그곳에서 화자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그리고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그 노래를 목놓아 부르게 될 것이지만 그는 누구이고 천고의 뒤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화자는 장차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부르게 될 것이라고 명시한다. 광야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아온 이유는 모호한 말 속에 부정할 수 없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지금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시인도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광복이 올 것이라는 강렬하며 확고한 믿음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살아있기에 광야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읽은 좋은 시26
무등을 보며/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5연으로 된 《무등을 보며》전문이다. 6·25전쟁 직후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교수생활을 하던 시절, 물질적·정신적인 허기를 달래며 쓴 시이다.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진초록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처럼, 한낱 가난 때문에 우리들의 본질이 남루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무릎 아래 지란(향초)'을 기르는 무등산처럼 우리들도 자식들을 기르며, 부부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다가 달관과 여유로운 자세로 인생의 오후를 받아들이자는 내용이다. 그래서 가시덤불 속에 뉘어질지라도 옥돌처럼 호젓하게 묻혔다고 위안을 삼자고 노래하고 있다. 세사에 시달리면서도 짐짓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등을 보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내가 읽은 좋은 시27
저녁 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출처]저녁눈 - 박용래 -|작성자안정식
이 詩는 1960년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의 눈 내리는 풍경을 단순하면서도 정 감있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여기서 ‘말집’은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귀틀집을 말하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합니다.등도 그럴 고요 이 詩를 읽다 보면 무엇보다, 언젠가 우리가 눈이 내리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을 때, 똑같이 내리는 눈들 도 유독 어느 한두 군데에 더 많이 내리며 쌓이는 듯 여겨지는 느낌이 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우리의 그런 느낌을 대신 표현해 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눈이 붐비는 장소 중 ‘변두리 빈터’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겠습니다만.
[출처][231218 시/글]저녁 눈 (박용래, 1925~1980) /인생의 맛( 앙투안 콩파뇽)|작성자수산나
내가 읽은 좋은 시28
갈대/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시는 신경림의 초기 경향을 대표하는 시로, 인간 존재의 비극적인 생명 인식을 보여준 작품이다. 다시 말해, 삶의 근원적인 비애를 '갈대'의 울음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갈대'가 연약한 인간 존재를 상징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갈대는 '울고 있고', '흔들리고 있고', '바람도 달빛도 아닌 제 조용한 울음으로 흔들리고 있으며' , '사는 것 자체가 조용한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갈대의 존재는 내부적이고 근원적인 고통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29
산정묘지1/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러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성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 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 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음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 묘지』, 1991)
한없이 투명하고 한없이 견고한 정신의 드높은 경지. 그 곳이 바로 조정권의 시가 도달하려는 세계이며, 그 성과로 나나탄 것이 곧 「산정 묘지」 시편이다. 정신적 순결성과 이미지의 명징성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룬 세계, 말고 투명하면서도 유동하지 않고 집중된 응결의 힘을 보여 주는 세계, 그는 바로 이런 공간을 꿈꾸어 왔고, 마침내 그는 그 정점에 우뚝 서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양적인 정신주의를 바탕으로 한 치열한 사유의 깊이와 그것을 담아낸 언어 선택의 정점 때문에, 그의 시는 명상시(瞑想詩)라고 불리는 한편, 일제 치하의 육사의 「절정」과 방불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즉 ‘하늘도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와 같은 극한적 현실 상황 속에서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겨울은 강철로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자기 극복과 초월의 모습을 이루어낸 육사의 자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시의 ‘산정 묘지’는 「절정」의 ‘절정’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산정 묘지」는 30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로 허무와 싸움을 통해 정신적인 극복을 성취해 가는 초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초인(超人)이란 니체(F. Nietzsche:1844~1900)에 의하면 ‘대지에 뿌리박고 살면서 자력에 의해 자기 극복을 성취함으로써 정신의 상승을 획득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다시 말새, 어떤 초자연적 · 초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의 대결을 통해 자기 극복과 구원을 이루어 가는 현실적인 인간이다. 조정권은 그것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시에 ‘결빙’ · ‘광석’ · ‘얼음’ · ‘씨앗’ · ‘뼈’ 등과 같은 견고성 이미지들을 빈번히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는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이나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리지 않는다면’ 이라는 구절에서 그 같은 초인적인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현실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이다. 그의 시에는 ‘밤’ · ‘어둠’ · ‘겨울’ · ‘결빙’과 같은 하겅적 이미지 시어들과 함께 ‘없다’ · ‘않다’ · ‘못한다’ 등의 부정 종지법, 그리고 ‘가장’ · ‘못내’ · ‘끝내’ · ‘마침내’ 등의 단정 부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비관적인 세계 인식의 태도는 무(無)와의 대결로 응집된다. 그러므로 ‘산정 묘지’라는 제목의 ‘산정’과 ‘묘지’가 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무와의 대결 또는 무의 초극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정(山頂)’은 지상의 맨 끝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공간이며, ‘묘지’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의 세계, 곧 무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시인은 이 무와의 첨예한 대결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초극 의지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이 시는 허무한 지상적 삶을 초월하고, ‘가장 높은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산정 묘지’에 다다르려 하는 시인의 현실 초극 의지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내가 읽은 좋은 시30
거울/이 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6연 13행의 자유시로, 행과 연은 구분되었으나 띄어쓰기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이상은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데 이것은 정서법이나 기존의 율격의식 같은 모든 상식이나 질서를 거부한다는 뜻도 된다.
「거울」은 '꽃'이나 '산' 등 자연을 대상으로 한 서정시와는 달리 자의식의 상관물인 '거울'을 대상으로 자의식세계를 그린 것이다.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대응시키고 있지만 그 둘이 끝내 합쳐질 수 없는 자아분열(自我分裂)의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자아를 상실하고 고뇌하는 현대의식의 비극성을 나타낸 것이다.
'거울', 곧 자의식은 인간이 그 자신과 만나는 의식공간이기도 하다. 자의식의 주체인 '나'와 그 객체가 되는 '나'와의 관계를 교묘하게 극화시킨 이 시는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술로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두개의 귀가 거울 속에 있다고 한 것이라든지, 또는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왼손잡이라고 한 것 등 모두가 '거울'을 통해서 인지할 수 있는 평범한 사실들의 나열이다.
그럼에도 이런 평범한 사실들의 환기가 우리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이 시의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잊고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던 것들을 충격적으로 환기시켜주고 있다.
이 시의 핵심부인 5·6연에서 작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절망, 그리고 비극성을 제시한다. 내가 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불안감이나, 또는 현실에 쫓기는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서로 제어할 수 없는 분열을 겪고 있는 좌절과 비극성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읽은 좋은 시31
흰 바람벽이 있어/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고향을 떠나 홀로 살아가는 인물의 쓸쓸한 마음을 한 편의 영상처럼 그린 작품이다. 좁은 방에 혼자 있던 시적 화자는 흰 바람벽의 쓸쓸한 풍경에서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을 향한 시적 화자의 그리움은 흰 바람벽에 영상으로 흐르면서 쓸쓸한 정서를 더욱 고조시킨다. 곧이어 영상이 끝난 후 바람벽에는 글자들이 지나가는데, 이 글자들은 지금의 처지에 대한 체념적이고 수용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기가 가난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지만 고결한 정신을 간직한 채 살아갈 운명이며, 이는 자신이 하늘의 은총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바람벽에 투사된 내면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현실의 세계에서는 패배했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읽은 좋은 시32
백록담/정지용
1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 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 새끼를 낳느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애 움매애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아 솨아 솔 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 긔여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石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 식물을 새기며 취(醉)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어 산맥 우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 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 정지용, 「백록담」
*촉루: 해골.
*흰 돌바기: 흰 돌 박힌.
*숭없지: 말이나 행동 따위가 불쾌할 정도로 흉하지.
*놋낫: 빗발이 굵고 곧게 뻗치며 내리쏟아지는 모양.
이 시는 산문시로 민족의 정기가 서린 백록담에 오르기 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1연에서는 화자의 장소이동과 함께 시간의 흐름이 드러나며 절정에 가까이 화서 기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2연은 1연의 긴호흡과 다르게 짧은 호흡으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어나는 화자의 모습을 그리며 3연과 4연에서는 각각 자작나무를 보고 도체비꽃을 보며 이들을 의인화해 자연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냅니다.
5연~6연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펼처집니다.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만소를 만난 화자는 각자 있는 마소들에게서 그리고 어미를 여읜 송아지가 모샋이 다른 어미(털색깔이 다른 어미 즉, 친 혈육이 아닌 대상)에게 맡겨지는 것을 보고 슬픔을 느낍니다.(이는 시대 상황과 연관되어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7연~8년에서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풍경, 동물들이 ㅇ러 식물을 취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며 다시 백록담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9연에서 정말 맑고 깨끗한 백록담에 도달하여 몰아의 경지를 느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때 9연에서 화자의 쓸쓸함과 깨다 졸다 기도마져 잊었더니라라는 표현이 아오는 데 이를 구체적으로 해석하려면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기>가 나와야하니 일단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문제를 풀 때 <보기>가 나오면 이를 해석 기준으로 삼아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시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백록담에서 느끼는 신비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전문해석을 통해서 학습을 마무리해보도록 합시다.
내가 읽은 좋은 시33
자화상/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1]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2]
그리고 한 사나이 [3]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소중하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면을 쓰거나 꾸미지 않은 순수한 자기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첫 구절이 그렇다.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간' 시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기대감이 부풀었을까? 실망감에 빠져 마주하기가 두려웠을까?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이 펼쳐진 하늘, 파아란 바람이 부는 가을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다. 자신과 마주한 첫 느낌은 미움이었다. 왜 미워졌을까? 기대가 컸기 때문에. 초라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려다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다시 돌아와 들여다 본 모습 역시 그대로여서 미운 감정이 올라온다. 미움과 측은지심이 교차하다 그리움으로 바뀌고 이젠 추억이 된다.
일상에서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많다. 자신의 존재가 보잘것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아 존중감과 자기애가 부족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가면을 쓰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용기 있게 바라보고 처음에 가졌던 미운 감정을 정화하여 그리움으로 승화하였다. 자기 부정에서 자기 긍정으로 관점을 전환하였다.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다.
<자화상>은 남을 의식하며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가느라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진정으로 자신을 믿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시의 구성을 보면 전반부 3~5행의 행갈이와 마지막 11~13행의 행갈이에 다소 차이점이 있다. 이와 같이 행갈이를 달리 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출처][윤동주] 자화상|작성자까만천사
내가 읽은 좋은 시34
절정/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의 뜻, 국어사전에 '산의 맨꼭대기', '사물의 진행이나 발전이 최고의 경지에 달한 상태'라고 나옵니다.
시인님은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17번이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투쟁하는 길은, 시인님이 위의 산문에서 썼듯이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입니다.
그 과정은 얼마나 극도의 긴장의 연속이었겠는지요. 그래서 '절정'은 점점 가까워져 오는 일제의 옥죄임에 몰려 더 나아갈 수 없는, 그렇다고 굴복할 수 없는 투사의 '극한 상황'이라고 새겨봅니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이육사 시 '절정' 중에서
'매운 계절의 채쭉'(채찍). 이 몇 음절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스며있겠는지요. 매서운 겨울의 칼바람 같은 채찍이라고 합니다. 이 가혹한 추위는 일제하의 폭압의 시간이며, 그 냉혹한 시간에 맞서는 시인님의 투쟁의 시간입니다.
시인님은 그 '채찍에 갈겨' 조국에서 내몰려 '북방으로 휩쓸려'왔다고 합니다. 북방은 만주 같은 특정 공간일 수도 있고, 어떤 혹독한 상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느껴지고('매운'), 잔인하게 휘두르는 일제의 가혹함이 선연히 보이는('채찍') 것만 같습니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시인님이, 아니 일제 강점기에 고통받는 우리 민족이 내몰린 상황은 '북방'에서 '고원'으로, 고원에서 다시 '서리빨 칼날진 그 위('우')로 좁혀졌습니다. 하늘이 끝난 곳이라고 여겨질 만큼 아득히 높은 고원, 그중에서도 서릿발 칼날진 위에 서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을 이 짧은 시 구절 속에 새겨 놓았네요. 간결하고 강밀한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도 시인님과 함께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선 듯 호흡이 가빠집니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구원의 기도를 위해 어디에 무릎을 꿇어야할까요? '재겨디딜'(제겨디딜)은 '발끝이나 발뒤꿈치만으로 땅을 디디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무릎을 꿇을 대상조차,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선 우리를 구원해 줄 누구도 없다는 절망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그런데 시인님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칼날진 그 위'에 선 시인님은 절망 대신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관조(觀照)'를 택합니다.
'겨울'. 견디기 어려운, 모든 생명이 위축되는 시련의 시간입니다. 시인님은 관조를 통해서 자신에게, 우리 민족에게 닥친 이 '겨울'을 직시하고 통찰합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시에서 해석이 가장 분분한 마지막 행입니다.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이 글의 서두에서 만난 시인님의 산문을 떠올려봅니다.
-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혹한의 '겨울'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며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건 비장한 투쟁이었을 것입니다.
'무지개'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장한 투쟁으로 성취해야 할 희망으로 새깁니다. 지금은 손에 잡을 수 없지만 어딘가에 있는 무지개/희망입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
겨울/시련 속에 강철처럼 단단한 무지개/희망이 잉태되어 있다는 걸까요? 자신의 의지로 강철/겨울을 부수어야 만날 수 있는 것이 무지개라는 말일까요?
어느 쪽이든 '겨울'의 시간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려는, 시인님의 칼날처럼 날카롭고 번쩍이는 정신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나는 육사처럼 치열한 정신을 안으로 감추고
놀라우리만큼 자기의 자랑을 스스로 지키면서
칼날 같은 세대(世代)에서 칼날을 맞세우고 살아간 분을 보지 못했다.
그는 참다운 의미에서 멋쟁이였고 신사였었다.
- 「원전주해 이육사 시전집」(박현수 지음, 예옥, 2008년)에 실린 박훈산의 산문 '항쟁의 시인 - 육사의 시와 생애' 중에서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김희곤 지음, 지영사, 2000년)이 발굴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으로 추정되는 감옥에 이육사 시인님과 함께 갇혔던 독립운동 동지 이병희 님(여성)의 증언입니다.
이육사 시인님의 콜록콜록하는 기침소리가 밤낮으로 감옥에서 들려왔다고 합니다. 시인님은 폐병으로 원래 몸이 약한 데다가 잘 먹지도 못하고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느라 더욱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먼저 풀려나온 이병희 님은 나중에 간수로부터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통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
시인님이 돌아가신 때는 1944년 1월 16일 새벽, '치열한 정신을 안으로 감추고' '칼날 같은 세대에서 칼날을 맞세우고' 타오르던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 시인님의 고귀한 '자신에 대한 희생'이 있었기에 시인님 순국 1년 7개월 뒤 우리에게 해방이 왔습니다.
내가 읽은 좋은 시35
그리움/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닭 않은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세기의 로맨스,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 시인의 사랑
청마 유치환 시인님의 시 '그리움'은 1965년 발간된 시인님의 13번째 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에 실렸습니다. 시집의 제목도 시 '그리움'의 한 구절을 따서 지었네요. 그만큼 시 '그리움'은 시인님에게도 중요한 시라는 뜻이겠네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그리움' 중에서
시 '그리움'은 아주 절절한 사랑시입니다. 시에서 시인님의 가쁜 숨결이 느껴집니다. 파도는 잠시도 쉬지 않지요. 시인님의 그리움도 끊임없이 밀려오네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이 구절은 사랑을 향한 그리움도, 그 그리움을 어쩌지 못하는 괴로움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시인님의 절규로 들리네요. 파도처럼 잠시도 멈추지 않고 일어나는 그리움과 괴로움, 희망과 절망으로 시인님 마음은 온통 폐허가 된 것만 같습니다.
이 시에 대해 시인님은 '40대의 그리움'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 : 김광회 엮음, 지문사, 1984년)
과연 시인님은 누구를 이토록 연모하고 있을까요?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 유치환 시 '그리움' 중에서
그즈음 청마(靑馬) 유치환 시인님의 삶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 님(1916~1976, 경북 청도)입니다. 당시 두 사람의 공공연한 로맨스는 세간의 큰 화제였습니다. 과연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1945년 해방 후 청마는 통영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게 됩니다. 거기에 정운은 가사교사였고요. 청마 38세, 정운은 30세였네요.
청마는 처음 3년 동안 정운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뭍같이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열렸다고 하네요. 그리고 두 사람은 20년의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20년 동안 문학의 동지로 편지로만 사랑을 나누었던 관계입니다. 청마는 매일 정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무려 5,000여 통에 달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희대미문(稀代未聞)의 로맨스가 아닐 수 없네요.
이영도 시인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영도 시인님의 시비(詩碑)가 부산 동래구 온천동의 금강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시비에 3편의 시조가 새겨져 있네요. 이 시조 속의 정(情)이 청마를 향한 것이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 심지 돋으고 이마 맞대이면 / 어둠도 도운 애정에 삼가한 듯 둘렸다
- 이영도 시조 '단란' 전문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 알알 익은 고독 기어히 터지는 추정(秋情) /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 이영도 시조 '석류' 전문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 이영도 시조 '모란' 전문
이영도 시인님은 이호우 시인님(1912~1970)의 여동생입니다. 이호우 시인님은 우리 모두 사랑하는 '개화' '살구꽃 핀 마을'을 쓴 시인님입니다.
내가 읽은 좋은 시36
윤사월(閏四月)/박목월
송화(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윤사월: 음력으로 4월에 든 윤달
*윤달: 윤년에 드는 달
달력의 계절과 실제 계절과의 차이를 조절하기 위하여 1년 중의 달 수가 어느 해보다 많은 달을 이른다.
즉, 태양력에서는 4년마다 한 번씩 2월을 29일로 하고, 태음력에서는 19년에 7번, 5년에 두 번의 비율로 한 달을 더하여 윤달을 만든다.
*문설주: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
우리 조상들은 윤달이 든 달에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무덤을 옮기는 이장을 하였다.
이 때에 하면 동티가 나지 않아 후손들이 편안하였기 때문이다.
또 할머니가 있는 집에서는 할머니가 본인의 수의를 직접 만들기도 하였다. 윤달에 미리 수의를 만들어 두면 오히려 장수를 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큰 일은 대응할 시간을 미리 예고라도 하며 오는 경우는 많지 않아서 닥치면 매우 당황하게 된다.
장례 치를 준비나 문상객 맞을 준비로 바쁠 것을 미리 아는 어른들은 당신을 위한 일들을 손수 마련해 놓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영정사진과 수의를 미리 만들어 놓음으로써 상주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사려 깊은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런 윤달이 든 음력 사월의 소나무꽃가루가 노랗게 세상에 날릴 때, 해도 길어지고 따뜻해진 날이다.
죽음의 이미지가 시의 배경에 안개처럼 깔려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외딴 산 꼭대기의 판대기로 지은 산지기 집이 있다.
그 산지기에게는 어미 없이 키운 눈 먼 딸이 하나 있는데, 십 수 번의 봄을 맞이하고 보내는 동안 그 어린 딸은 처녀애가 되었고 산지기는 늙어버렸다.
보이는 건 하나 없어도 꾀꼬리 소리와 함께 있을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느라 문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는 문설주에 살짝 귀를 대고 무언가를 들으려는 눈먼 처녀애는 이 적막하고 고독한 산 중에 한없이 안타깝고 마음 저리게 하는 주인공이다.
이것이 이 시가 갖는 비극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출처]윤사월(閏四月) l 박목월|작성자브라바 헬렌
'내가 읽은 좋은 시 > 많이 읽히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많이 읽히는 시//내가 읽은 좋은 시)4 (0) | 2024.05.23 |
---|---|
많이 읽히는 시(내가 읽은 좋은 시)2 (0) | 2024.05.23 |
많이 읽히는 시//내가 읽은 좋은시)1 (2) | 2024.05.23 |
48. 남해 금산///이성복 (0) | 2024.05.21 |
47. 죽편1//서정춘 (0) | 202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