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3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시의 구성은 1~8행까지의 처음, 9∼23행까지의 중간, 24∼32행까지의 끝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에서는 박시봉의 집에 들기까지의 방황의 과정을, 중간 부분에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느낀 슬픔과 절망감을, 끝 부분에서는 현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각성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에 가까운데, 가족과 떨어져서 객지의 낯선 방에 칩거한 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슬프고 부끄러운 과거의 삶을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크고 높은 것”의 존재를 깨닫고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 과정이 잘 드러난다. 시의 끝부분에서는 ‘갈매나무’를 통해 “드물고 굳고 정한” 존재를 향한 자아의 이상을 투사한다.
이 시에서는 유장한 호흡과 잦은 쉼표로 내면의 진솔한 고백을 담아낸다. 내면의 독백이 사실적으로 전달되는 이 시의 산문적 어조는 압축과 절제의 방식보다 화자의 회한과 숙고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러한 어조로 인해 이 시의 진정성은 더욱 부각된다.
이 시의 독특한 개성을 이루는 갈매나무의 상징은 산문적 진술만으로 획득하기 힘든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아름답고 고고한 갈매나무에서 오랜 번뇌의 끝에 집착에서 벗어나 새롭게 각성된 시인의 자아를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민족의 고난과 함께 하는 유랑생활의 비애를 그리면서도 숭고하고 강한 의지를 지향하는 고매한 정신을 제시하여 한국시의 수준을 드높이 끌어올린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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