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한강 시

22. 한강 시//거울 저편의 겨울 2 /

월정月靜 강대실 2024. 10. 20. 13:54

22. 거울 저편의 겨울 2 / 한강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산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한강, 「거울 저편의 겨울 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