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많이 읽히는 시

46.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월정月靜 강대실 2024. 5. 21. 11:40

내가 읽은 좋은 시46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간행한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의 표제작이다. 강은교의 시세계에서 볼 수 있는 초기의 허무주의적 경향은 1980년대 이후 일상적 삶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보다 긍정적인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로 전환한다. 이 작품은 이같은 시적 변화의 과정을 통해 도달하고 있는 너그럽고도 포근한 정서를 기반으로 삶에 대한 사랑의 깊은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연부터 제2연까지는 물이라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들의 만남을 희구한다. 여기서 물은 생명이며 축복이다.

죽은 나무를 적시며 강물을 이루고 바다로 나가는 물이 된다는 것은 생의 궁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연에서는 시상이 전환된다. 여기서는 물의 화해로움과 사랑의 의미 대신에 불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현실적인 투쟁적 만남이 문제시된다. 불은 파괴이며 징벌이며 죽음이다. 불의 만남은 열정적인 승화라기보다는 생명이 없는 숯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제4연에서 불의 고통과 번뇌와 파괴와 죽음을 모두 넘어선 다음에 다시 물로 만나기를 희구한다. 이것은 삶에 대한 긍정이면서 동시에 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가 물이 되어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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