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

[스크랩]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

월정月靜 강대실 2012. 4. 21. 22:10
728x90
 
 

 

 

  나의 마지막 작별
         호세 리잘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형제들이여, 그대는 한 올의 괴로움도
망설임도 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아낌없이 생명을 바쳤구나
월계수 백화꽃 덮인 전나무관이거나
교수대거나 황량한 들판인들
조국과 고향을 위해 생명을 던졌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두운 밤 지나고
동녘에서 붉은 해 떠오를 때
그 여명 속에 나는 이 생명 마치리라
그 새벽 희미한 어둠 속
작은 불빛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나의 피를 흩뿌려
어둔 새벽 더욱 밝히리라


나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혈기 넘치는 지금이나
나의 소망 오직
동방의 진주 너를 흠모하는 것
검고 눈물 걷힌 너의 눈
한 점 꾸밈도 부끄럼도 없는
티없이 맑고 부드러운 눈
동방의 진주 너를 바라보는 것이었노라


이제 나는 너를 떠나야 하는구나
모든 즐거움과 절실한 열망을 버리고
아, 너를 위해 가슴 속에서 우러나
만세 만세를 부르노라
우리에게 돌아올 최후의 승리를 위해
나의 죽음은 값지리니
네게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조국의 하늘 아래 숨 거두어
신비로운 대지에 영원히 잠들리니
아, 행복하여라


먼 훗날 잡초 무성한 내 무덤 위에
애처로운 꽃 한 송이 피었거든
내 영혼에 입맞추듯 입맞추어 다오
그러면 차가운 무덤 속
나의 눈썹 사이에
너의 따스한 입술과 부드러운 숨소리 느끼게 되리니
부드러운 달빛과 따스한 햇빛으로
나를 비쳐다오
내 무덤가에 시원한 솔바람 불게 하고
따스하게 밝아오는 새 빛을 보내다오


작은 새 한 마리
내 무덤 십자가에 날아와 앉으면
내 영혼 위해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해 다오
불타는 태양으로 빗방울 증발시켜
나의 함성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게 해 다오
너무 이른 내 죽음을 슬퍼해 다오
어느 한가한 오후
저 먼 저승의 나 위해 기도해 다오
아, 나의 조국
내 편히 하늘나라에 쉬도록 기도해 다오
불행히 죽어간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 다오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기도해 다오
고난 속에 눈물짓는 어머니들을 위해
기도해 다오
감옥에서 고문으로 뒹구는 형제들
남편 잃은 여인들과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다오


내 무덤가 십자가 비석도 잊혀져 가면
삽으로 밭을 일궈
내 무덤에서 시신의 재를 거두어
조국 온 땅에
골고루 뿌려 다오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 다오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형장으로 가노라
내 부모, 사랑하던 이들이여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


잘있거라, 서러움 남아 있는,
나의 조국이여
사랑하는 여인이여
어릴 적 친구들이여
이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는 안식에
감사하노라. 잘있거라
내게 다정했던 나그네여
즐거움 함께했던 친구들이여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호세 프로타쇼 리잘 메르카도(Jose Pritacio Rizal Mercado)는 1861년 6월 19일,
          라구나 주의 칼람바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프란시스코 메르카도(아버지)와 테오도라
알론소(어머니)의 2남 9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그 당시 호세 리잘의 아버지는 칼람바 최초의 석조가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제분소,약국       그리고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호세 리잘의 어머니는 교육을 잘 받은 여성으로서 그것을
뒷받침해 주듯이 호세 리잘의 집 서재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다.
리잘은 2살 때 영어의 알파벳을 모두 익혔으며 세 살 때는 누이들의 그림책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어느날 밤 어린 리잘은 등불 주위를 맴돌며 날아다니고 있던 나방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리잘의 어머니는 리잘에게, 등불이 좋아 엄마나방의 말을 듣지 않고
등불에 가까이 갔다가 날개가 타서 죽은 어린나방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린 리잘은 왜 어린 나방이 등불 속으로 날아들어가 타 죽었는지 이해했다.
어린 나방처럼 리잘도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등불옆에 있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서 등불이란 곧 진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어린나이에도 리잘은 당시 필리핀 민족이 처한 음울한 시대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필리핀은 독립국가가 아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호세 리잘은 나이에 비해 늦게 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의 모든 상을 휩쓸었으며,
성적은 언제나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아테네오를 졸업한 후 리잘은 산토 토마스 대학에 입학했다.
리잘은 산토 토마스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의학 못지않게 시와 미술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호세 리잘의 대학 성적은 아테네오에서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렇지만 리잘은 의사로서 병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의술을 베풀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그 무렵 리잘은 레오노르 리베라라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다.
레오노르는 당시 라 콘코르디아 대학에 재학중이었다.
레오노르 역시 리잘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꼈으며, 리잘과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리잘은 21세가 되었을 때 그의 형인 파시아노에게 스페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시아노는 리잘에게 356페소를 주었으며 리잘은 그 돈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떠났다.
리잘은 1882년 5월 3일 배편으로 마닐라를 떠났으며 그로부터 한달 뒤에 유럽에 도착했다.
리잘은 항해를 하는 동안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여행 중 방문한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에
관하여 일기를 썼다.
리잘은 Universidad Central de Madrid에서 의학공부를 계속했다.
리잘은 의학 외에도 독일어, 영어, 미술 그리고 펜싱 등에도 많은 흥미를 느꼈다.
리잘의 형은 리잘에게 매달 50페소의 학비를 보냈다.
사실 50페소란 돈은 리잘이 스페인에서 유학생활하기에는 어처구니 없이 모자라는 액수였다.
따라서 리잘은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교통비도 없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던 리잘은, 한번은 영양실조에 걸려 병상에 누운 적도 있었다.
리잘은 스페인 신부들과 통치자들이 필리핀인들을 무지하고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리잘은 그 소설의 제목을 “Noli Me Tangere - 나를 건드리지 말라”로 정했다.
1884년 리잘은 그의 의학수업을 모두 마쳤다.
리잘은 안과수술 실습을 더 하기 위해 파리에서 다시 독일로 건너갔다.
리잘은 그곳에서 칼 울머라는 목사를 만나 그의 집에서 여름을 보내며 독일어를 공부했다.
1987년에 리잘은 그의 소설 「Noli Me Tangere - 나를 건드리지 말라」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필리핀의 젊은이들 사이에 그 소설은 널리 읽혀졌다.
이에 스페인 당국은 매우 분노했으며 그 소설을 금서로 지정하게 되었다.
필리핀에 있던 리잘의 친구들은 리잘에게 필리핀으로 귀국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리잘은 가족을 돕기 위해 그가 ‘자유의 땅’이라고 불렀던 유럽을 떠나 마닐라로 향하게 된다.
리잘은 집에 머물며 분주히 의학 실습을 했다.
리잘은 시력을 잃어가는 환자들의 눈을 수술해 주었다.
칼람바 사람들은 리잘을 ‘독일에서 온 의사’라고 불렀다.
농지 임대료는 계속 인상되어 소작농인 필리핀 사람들은 허리띠를 계속 졸라매는 반면
스페인 신부들은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해 나갔다.
리잘은 농부들을 선동해 인상된 농지 임대료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신부들의 눈에는 리잘이 목에 걸린 가시같이 보였다.
신부들은 스페인 총독이 리잘을 감옥에 가두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리잘의 가족은 리잘에게 유럽으로 되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리잘은 5개월간 자신의 고향인 칼람바에 머물다 다시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리잘은 유럽으로 가는 도중 일본, 홍콩 그리고 미국에 들렀다.
리잘은 미국에서 3주간 머물다 영국으로 향했다.
리잘은 영국에 머무는 동안 스페인 신부들이 고국에 있는 그의형 파시아노와
그의 4명의 매형들의 땅을 빼앗아 갔으며 수많은 필리핀 인들이 스페인 당국에 반대하는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고국에서 진행되는 개혁운동을 돕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있던 필리핀 지식인들은
 ‘라 솔리다리다드’라는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로는 Graciano Lopez Jaena, Marcelo H. del Pilar, Mariano Ponce,
Antonio Luna, Rizal 그리고 Blumentritt 등이 있다.
리잘은 필리핀 국민을 변호하는 수많은 기사와 사설을 그 신문에 실었다.
리잘은 스페인 정부가 필리핀 국민을 스페인 국민들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필리핀 국민은 스페인 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
리잘은 얼마 후 고국으로부터 더 가슴아픈 소식을 들었다.
그의 매형 중 하나가 사망했는데 교회가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과
그의 큰형 파시아노를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이 필리핀 남쪽 섬으로 유배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스페인 당국은 칼람바 사람들의 집과 농토를 모두 빼앗고 그들을 외부로 몰아내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또 한 가지 슬픈 소식은 리잘의 여자 친구였던 레오노르 리베라가
한 영국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잘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영국인은 자유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리잘은 한탄했다.
 
1891년 9월 리잘은 그의 두번째 소설인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완성했다.
그는 이 소설을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처형된 세 명의 필리핀 신부인 부르고스, 고메스 그리고
사모라 신부에게 바쳤다.
이 소설은 리잘이 처음에 집필한 ‘놀리 메 탕게레’보다 더욱 과감한 소설이었다.
 
「필리부스테로」란 말은 ‘곧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애국자’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리잘은 그의 일기에 “전쟁터는 바로 필리핀이다”라고 썼다.
1891년 10월 18일 리잘은 유럽을 떠났다. 리잘은 여행을 하는 도중 5개국어로 일기를 썼다.
그 당시에 리잘은 11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리잘은 일단 홍콩에 들려 돈을 좀 벌었다.
홍콩에서 리잘을 찾는 환자가 많아졌다.
그들은 리잘을 ‘스페인 의사’라고 불렀다.
리잘은 홍콩을 좋아했지만 조국에서 고통받는 필리핀 국민들을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리잘은 어떠한 위험이 따르더라도 필리핀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스페인 당국은 리잘이 필리핀에 입국한 이래로 리잘을 계속 미행했으며
리잘을 체포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리잘은 곧 그의 몇몇 친한 친구들과 「라 리가 필리피나」라는 사회단체를 결성했다.
리잘은 연설을 통해 「라 리가 필리피나」가 필리핀 국민들을 단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연설을 한 지 3일 후 리잘은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체포된 후
산티아고 요새 감옥에 투옥되었다.
리고 그는 잠보앙가의 다피탄이라는 외롭고 한적한 읍으로 유배되어 갔다.
리잘이 다피탄으로 유배되어 갔다는 소식은 필리핀 국민에게 커다란 분노를 안겨주었다.
특히 가난한 국민들 사이에서 이러한 분노가 컸으며 그중에는 안드레스 보니파쇼라는 젊은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드레스 보니파쇼는 리잘의 소설과 리잘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그의 친구들과 함께 「카티푸난」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했다.
카티푸난의 목적은 무장 혁명을 통해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1892년 7월 17일 리잘은 다피탄에 도착했다.
망명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리잘은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했다.
리잘은 마을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했으며 그 돈으로 인해 마을에는
마침내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다피탄에는 학교가 한 개밖에 없었다.
그래서 리잘은 자기 자신이 직접 학교를 하나 세워 직접 아이들에게 영어, 스페인어, 스포츠 등을
비롯해 여러 과목을 손수 가르쳤다.
아이들은 리잘의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리잘을 도와 커다란 폭포가 딸린 수영장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또한 가구 만드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리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리잘은 또한 그곳에 진료소를 차려놓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환자들 중 어떤 부유한 사람이
리잘에게 많은 돈을 치료비로 주었다.
그는 조세핀 브락켄이라는 딸을 동행해 다피탄으로 왔는데 조세핀과 리잘은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세핀은 그녀의 아버지가 홍콩으로 돌아간 뒤에도 다피탄에 머물렀다.
리잘 역시도 자유를 몹시 갈망했다.
리잘은 스페인 총독 라몬 블랑코에게 자원의사 자격으로 쿠바로 갈 수 있게끔 허락해
달라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7월 30일 리잘은 블랑코 총독으로부터 그렇게 해도 된다는 편지를 받았다.
리잘은 배를 타고 쿠바로 항해 하던 중 카티푸난 혁명이 일어나 반역죄로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필리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호세 리잘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나 스페인 당국은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내린다.
1896년 12월 30일 리잘 박사는 루네타(현재의, 리잘 공원)에서 스페인 소총분대에 의해
  총살당한다.

 

 

 

 

 
출처 : 행복한집(tomato house)
글쓴이 : 토마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