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월정月靜 강대실 2013. 9. 2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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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문학 예술(1956.11)

  

 

* 가을 :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간

* 겸허한 모국어 : 영혼의 소리(기도)

* 오직 한 사람 : , 절대자

* 가장 아름다운 열매 : 가치 있는 이상, 신의 축복, 사랑의 결실 등.

* 비옥한 시간 : 보람되고 알찬 가을의 시간

* 굽이치는 바다 : 고뇌와 수난의 인생길

* 백합의 골짜기 : 깨끗하고 찬란한 인생길

* 마른 나뭇가지 : 지극히 외로운 경지

* 까마귀 : 세상과 절연된 절대 고독의 경지

 

   

참고자료

 

김현승(1913~1975) : 호는 다형(茶兄) . 광주에서 주로 활동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가을의 시인',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며 지성적 감성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는 모든 것이 생명을 마감하는 가을을 맞이하여 내적 충실을 갈망하는 시인의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기도조 형식의 작품이다. 시인은 가을의 고독감 속에서 좀더 겸허해진 마음으로, 그 동안 살아온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삶의 참다운 가치를 추구하고, 더욱 경건한 삶을 준비하고자 한다.

가을이 환기하는 서정이 주가 된 1연은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메시지를 핵심으로 하여 낙엽모국어의 일상적 이미지를 낙엽이라는 생명 감각과 모국어라는 생활 감각으로 전이, 결합시킴으로써 생명에의 외경감과 그에 대한 겸허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낙엽이 뜻하는 죽음과 마주한 생의 겸허이며, 운명애(運命愛)에 대한 소중한 자각이다. 그러므로 낙엽의 떨어짐은 시인으로 하여금 생의 숙명성을 자각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운명에 대한 긍정과 사랑을 다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2연은 참된 사랑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1연에서 나타났던 낙엽의 이미지가 사랑의 이미지로 전이됨으로써 낙엽이라는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던 시인은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일상적 의미를 뛰어넘어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성, 한계성을 극복하고 절대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에는 사랑의 도덕률과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나타나 있는 한편,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는 구절 속에는 사랑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 가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 것이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 사랑의 원리는 이루어져 있는 열매를 따는 것이 아닌, ‘시간을 가꿈으로써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과정이자, 그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3연은 2연에서 밖으로 향하던 사랑이 자신의 내면을 향한 고독으로 전환되어 본질적인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는 구절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간 온갖 정성을 기울여 여름내내 화려하게 가꾸었던 잎을 스스로 떨구고 마른 나뭇가지가 된 나무처럼 인간도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회귀해야 하는 시간이 바로 가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자신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로 표상된 젊은 날의 열정과 번민을 극복하고, ‘백합의 골짜기라는 영적 환희의 세계까지도 초극함으로써, 마침내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은 절대 고독의 경지에 이른 경건하고 원숙한 인간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김현승은 후기에 가서도 이 고독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하여 <견고한 고독>, <절대 고독> 등의 출중한 시군(詩群)을 낳게 됨으로써 고독의 시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