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

[스크랩] * 박용래 시인 ( 시모음 )

월정月靜 강대실 2011. 1. 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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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시인 (시모음 )

박용래

1925년 충남 부여(강경)에서 출생, 강경상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시《가을의 노래》, 1956년 《황토(黃土) 길》,

          《땅》으로 《현대문학》에 박두진 시인의 추천.

1980. 11.25일 교통사고로 사망. 

향토적 정서를 간결하고도 섬세한 시어로 표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한 갈래를

형성한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9년 제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시집으로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궁』(1980), 『먼 바다』(1984) 등.

 

 

저녁눈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소나기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연시(軟枾)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건들 장마

건들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두막 처마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올린 베잠방이 알종아리 총총 걸음

건들 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산견(散見)

해종일 보리 타는
밀 타는 바람

논귀마다 글썽
개구리 울음

아 숲이 없는 산(山)에 와
뻐꾹새 울음

낙타(駱駝)의 등 기복(起伏) 이는 구릉(丘陵)
먼 오디빛 망각(忘却).

 

 

 

 

 

제비꽃

부리 바알간 장 속의 새,

동트면 환상의 베틀 올라 금사(金絲),

 은사(銀絲) 올올이 비단올만 뽑아냈지요,

 오묘한 오묘한 가락으로.

난데없이 하루는 잉앗대는 동강,

깃털은 잉앗줄 부챗살에 튕겨 흩어지고 흩어지고,

천길 벼랑에 떨어지고,

영롱한 달빛도 다시 횃대에 걸리지 않았지요.

달밤의 생쥐, 허청바닥 찍찍 담벼락 긋더니,

포도나무 뿌리로 치닫더니,

 자주 비누쪽 없어 지더니.

아, 오늘은 대나뭇살 새장 걷힌 자리,

 흰 제비꽃 놓였습니다.

 

 

 

 

해바라기 단장(斷章)

해바라기 꽃판을
응시한다
삼베올로
삼베올로 꽃판에
잡히는 허망(虛妄)의
물집을 응시한다
한 잔(盞)
백주(白酒)에
무우오라기를
씹으며
세계(世界)의 끝까지
보일 듯한 날.

 

 

 

 

 

 

 천(千)의 산(山)

댕댕이 넝쿨, 가시덤불
헤치고 헤치면
그날 나막신
쌓여 들어 있네
나비 잔등에 앉은 보릿고개
작두로도 못 자르는
먼 삼십리
청솔가지 타고
아름 따던 고사리순
할머니 나막신도
포개 있네
빗물 고인 천(千)의 산(山)
겹겹이네.

 

 

 

 

설야(雪夜)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잔(盞)

가을은 어린 나무에도 단풍 들어
뜰에 산사자(山査子) 우연듯 붉은데
벗이여 남실남실 넘치는 잔
해후(邂逅)도 별리(別離)도 더불어 멀어졌는데
종이, 종이 울린다 시이소처럼 2005-11-23




먼 바다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 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에,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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