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진대나무 붓다

월정月靜 강대실 2024. 8. 24. 18:24

 

 

진대나무※붓다 /월정 강대실                     
          
 

지리산 화엄사 등반길, 일찍이

발 잘 못 들이어 마음껏 천기 못 누리고

긴 허리 꼿꼿이 펴고 살 수 없어

대웅전 대들보로 택함 받지 못한 

 

해와 달이 먼 일가같이 못 본 척 해도

그윽한 꽃향내 벌 나비 분분히 찾고

나무갓 큰 품 쫓긴 산짐승 걷어안았을

 

나이 이길 재주 없어 생을 거두고

독야청청 허연 알몸이 절개 지켜 가더니

골바람에 그만 벌러덩 나자빠진

 

나락에 빠져도 아주 못되진 않다고

찾아든 청설모 산지니 앉아 쉴 등 대주고

산객 땀 밴 옷 받아 뽀송하게 말리는 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 있다는

 

바람의 발톱에 긁힌 흐물흐물한 살은

배고픈 중생 흰개미 땅강아지 지네들……

옆구리 곪아 터진 음부는 진물 빠는 버섯들

모름지기 공양할 제물이다는

 

그러고도 궁극에 남은 지스러기는 기꺼이

흙으로 썩고 섞이어 생명의 보금자리로 

보시의 공덕 닦아야 한다는

 

오늘 우연히 연이 닿아 상면했지만

어디서도 한 번을 뵌 적 없는

사람이 못할 일을 다 하는 진대나무 붓다.

 

 

※진대나무: 산에 죽어서 넘어지거나 쓰러져 있는 나무.

 2020. 01. 10. 

진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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