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

육탁 시 모음

월정月靜 강대실 2024. 9. 7. 03:45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숫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

닳은 구두 뒤축을 갈기 위해

구둣방에 갔는데, 늙은 수선공이

뒤축 대신 사과나무를 심어놓았다.

걸음 걸을 때마다

사과꽃 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음산 옆구리의 산골짜기가 고향이라던 늙은 수선공은

4월이 되면 늑골 깊은 곳에서 사과꽃이 핀다고 했다.

그러니까 늑골 깊은 곳은, 이제

돌아갈 수도 없는 옛집 마당.

늙은 수선공은, 이 도시 거리를

천진한 웃음이 사과꽃 향기로 퍼지는 마당으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뒤축 대신 사과나무를

구두에 심어놓는 불가해한 기술을 보여줄 리 없다.

그런데 내가 거리를 걷는 동안

아무도 사과꽃 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만개한 사과꽃 향기를 느끼지도 못했다,

시내를 뒤덮고 있는 벚꽃과 분명 다른 향기였는데도.

얼른 집에 돌아와 보여주었지만, 아내도

구두에 뒤축 대신 사과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늙은 수선공의 불가해한 기술보다

더 감쪽같은 이 도시의 변화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내 구두에 사과나무를 심던

늙은 수선공의 이마에서 촉촉하게 굴러 내리던

나뭇잎 위의 이슬 같던 그 맑은 땀방울을.

그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가슴속의 성전을 수선했던 것이다.

기억의 꼬리를 잡고

돌담집과 뒷골목과 대밭을 순식간에 돌아 나오는 늙은 수선공을

천 개의 눈을 켜고 바라보던 사과나무,

지금도 걸음 걸을 때마다 내 구두에서는

왈칵, 왈칵 피는 사과꽃 소리 들린다.

덜컹거리는 얼굴

머리 없는 사람이 있다.

머리도 없이

경주 남산에, 가부좌로, 천년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골짜기 오르는 사람들을 담담히 바라보는

풍화된 몸만 가진 사람이 있다.

 

몇 번이나 목 잘리고도

얼굴이 있어서 얼굴이 있어서 사진을 찍고

다시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고

그 이력서 품에 안고 아직도 잘릴 목 남았는지

머리 없는 목 위에

가만히 얼굴 얹어 확인해보는

사람 닮은 돌사람,

 

얼굴 없어서 얼굴 없어서 표정 보이지 않아도 되는 돌사람,

머리 없는 몸속에서 부처를 꺼낸

돌사람을 뒤에 두고

그 돌사람을 뒤에 두고

파리한 얼굴 덜컹거리며 남산 골짜기 오르는 한낮.

 

목 위에 붙어 아직도 덜렁거리는 파리한 얼굴의 한낮.

나는 벗긴다

퇴직하고 시골로 간 친구가

한 보따리 농산물 놓고 갔다.

뭔가 벗기는 일은

가을 저녁의 별미 같은 것.

티븨를 보는 대신

늙은 호박 껍질을 벗기고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고

도라지 껍질까지 벗긴 뒤

비닐봉지 뒤적거려 머윗대를 꺼낸다.

손가락 까매지도록

가을 저녁을 벗긴다.

생활의 껍질을 벗긴다.

나를 벗긴다.

난장판 거실 어느 구석에서

시골 친구가 흘리고 간

풀벌레, 울다 그쳤다 다시 운다.

대답이 없다

아버지,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다.

대문 여는 소리만 듣고도

왔느냐, 하시더니

마당에 서서 몇 번 불러도

방문 열리지 않는다.

나는 아직 이 적막을 믿지 못한다.

방문을 열자 사방에서 밀려나오는

아버지 냄새.

어둑한 시간을 껴입은 적막이

부재의 깊이를 보여줄 뿐,

간소한 세간살이와 몇 벌의 외출복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불쑥 손을 내밀 것 같은 아버지,

가는귀 어두워 들리지 않는 것일까.

대답이 없다.

실은 아버지도 큰 소리로 답하고 싶을 것이다.

대답은 존재 증명의 방법,

부르고 듣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가를

이제 알았냐고, 부재의 깊이를 껴입은 적막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아버지, 하고 불렀다

오냐, 아버지 냄새를 껴입은 침묵이

환청처럼 사각의 방 모양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빈집.

옷장에서, 낡은 장식장 서랍에서, 등긁개에서

아버지 손때가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는 빈집.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적막을 믿지 못한다.

달빛은 누렇게 변색된 아버지 일기장을 읽고,

나는 딴 한 번만 더 듣고 싶다, 그 대답을.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옥상에 상자 텃밭을 만들었다.

밑거름을 넣고

상추며 들깨 모종을 사다 심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물을 준 것 뿐인데 어느새

잎이 손바닥만 해졌다.

한 잎씩 채소를 거둬들이는데

푸릇푸릇 콧노래가 실실 새 나왔다.

부자가 이런 것이라면,

삿된 생각 한 점 들지 않고

그저 옥상에 동동 떠다니는 실없는 웃음을

데려와 웃거름으로 얹어주는 것이

행복이라는 재산을 불리는 일이라면

나는 엉뚱한 곳을

오래 기웃거린 것이다.

아하, 웃음이라는 배의 조그마한 항구

금은보화 싣고 출렁이는

볼록한 종이가방에서

푸른빛 환하게 흘러나오는 시간과

싱긋싱긋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내 이마에 걸리는 초여름 건들바람이

수확한 상추, 깻잎 쌈밥만큼 달달했다.

 

비 맞는 무화과나무

물 젖어 풀린 화장지처럼 무화과

과육이 흘러내렸다, 나무 아래 서성이는

내 어깨에 머리에 무화과 맨살이

취객의 오물처럼 엉겨 붙었다.

 

열매란 둥글고 단단하게 자라서

익는 것이라 여긴 내게

비 맞는 무화과, 이런 삶도 있다고

꽃 시절도 없이 살았던

뚝뚝, 제 안에 고인 슬픔을

빗물로 퍼내는 것 같다,

웅덩이 같은 몸을 가진 무화과.

 

누구나 웅덩이 하나씩은

가지고 살지, 상처를 우려내

가뭄 든 마음을 적시기도 하지,

그러나 너무 오래 고여 있으면

안 되는 웅덩이,

퍼 내지 못하면 결국

출렁이지도 못하고 뭉크러지는

영혼의 폐허가 되고 말지.

 

취객 같은 무화과나무 아래

내 가슴속의 무화과 어디 갔나, 나는

폐허처럼 서서 한참이나 비를 맞는다.

육탁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 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염소

염소가 말뚝에 묶여

뱅뱅 돌고 있다. 풀도 먹지 않고 뱅뱅 돌기만 하는 염소가

울고 있다.

우는 염소를 바람이 톡톡 쳐본다. 우는 염소를 햇볕이 톡톡 쳐본다. 새까맣게 우는 염소를 내가 톡톡 다독여본다.

염소 주인은 외양간 서까래에 목매달고 죽은 사람.

조문을 하고 국밥을 말아먹고 소피를 보고,

우는 염소 앞에서 나는 돌 한 개를 주워 말뚝에 던져본다.

말뚝은 놀라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고 꼼짝하지도 않으면서 염소 목줄을 후려 당긴다.

자기 생의 말뚝을, 하도 화가 나서 앞도 뒤도 없이 원심력도 같이 뜯어 먹어버린 염소 주인.

뿔로 공중을 들이박을 줄도 모르고

세상 쪽으로 힘껏, 터질 때까지 팽팽히, 목줄 당겨볼 줄도 모르던 주인처럼 뱅뱅 제 자리 돌기만 하는 염소가

울고 있다. 환한 공중에 동글동글 새까만 울음을 누고 있다.

그녀의 서가(書架)

세상에는 불타올라도 타지 않는

서가(書架)가 있다, 타오르면서도 풀잎 하나

태우지 않는 화염도 있다.

나는 저 불꽃의 마음 읽으려고

그렁거리는 차를 몰고 7시간이나 달려왔다.

층 층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석강 단애

한때는 사나운 짐승처럼 시퍼런 칼날

튀어나오던 삶이었겠다.

그럼에도 벼랑에만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새에게만은 둥지를 허락하는 여자였겠다.

악다구니 쏟으면서, 그게 가난에게 내지르는

주먹질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가파를수록 정 많고 눈물 많은 달동네

노을의 그 지독한 핏빛

아 나는 기껏 몇 권의 습작노트를 불태우고

한 세계를 잃은 듯 운 적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저렇게 불타올라도 용암처럼 들끓지 않는

그녀의 삶, 삶의 문장으로 채워진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가마우지새 되어

그녀의 서가에 한 권 책으로 꽂힌다.

미친 힘으로 벼랑 핥는 파도도

바다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비루한 삶의 풍경에까지 층층 겹겹

한 살림 불의 문장을 새겨주는 채석강 노을.

아라 홍련

만개한 붉은 연꽃이 미풍에 설렁거리고 있다. 설렁거리며 뭐라 뭐라 이야기한다.

 

내리쬐는 볕 속에서 어떤 이는 맑은 향기의 내력을 듣고, 또 어떤 이는 칠백 년 기다림이 부활하는 소리 듣는다.

 

후끈 밀려오는 물 냄새에 코를 킁킁대며 못가를 걷다 보면 설렁거리는 그 연꽃들 사이로 고려의 흥망성쇠가 보이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말발굽 소리 출렁거린다.

다시 귀 기울이면 발해 유민들의 목소리가 수런거리고,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소리,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하는 소리 걸어 나오고, 목화 벙글고 피는 소리 일렁거린다.

 

만개한 붉은 꽃잎 섬세한 그물맥으로 새겨진 칠백 년 시간의 길.

 

자기 몸을 깨야 싹이 트는 신생의 신화를 들려주고 있다. 함안의 고려 연못 터에서 솟아난 그 찬란한 소리를 나는 오늘 귀동냥 눈동냥하고 있다.

모서리의 무덤

조개껍질을 줍는다 백사장 조개껍질은 깨진 것도 둥글어져 있어, 시간의 오랜 힘이 모서리를 데려가 이 바닷가

모래로 부려놓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바닷가에 와서 삶의 모서리를 굴리고 굴려 떨구어 냈을 것인가.

파도가 지나가자 내 위장 속에서 깨진 조개껍질 절걱거린다. 절걱거리며 위장을 찢고, 드디어는 출혈이 시작된다. 내 위벽 천공은 잦은 과음 탓이 아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던 중년의 무게를

저 파도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분노는 독이 될 뿐이라고 시퍼렇게 후려치며 모멸감에 떨었던 마음 파편을 쓸어가는 바다.

경솔한 자들의 입방아가 허옇게 거품 물고 스러진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성을 쌓고, 나는 조개껍질을 줍다 본다. 저것은 무덤을 빠져나온 생각의 흰 뼛가루, 눈부신 반짝임은 폭양의 장례식 만장.

없는 모서리가 내 마음을 툭 치고 간다. 그러니까 둥글어진다는 것은 거친 세파(世波)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잘 소화시켰다는 것, 삼킨 모서리 소화시키느라 내 위장은 늘 상처투성이다. 그러니 둥글게 산다는 것은 자기 안에 수천 개 흉터를 가지고 사는 일.

모서리를 떨구러 온 사람들이 와와와와 바다에 뛰어든다. 둥글어지기 위해 무덤처럼 둥근 튜브에 몸을 끼운 채, 그러나 평생 바닷가에 살아도

둥글어지기 힘든 삶도 있다. 시인이란 족속, 새로 태어나기 위해 날마다 마음의 알 깰 수밖에 없는, 뾰족한 모서리를 자기 안에 넣고 굴리고 굴릴 수밖에 없는

정신의 흰 뼈, 뼈의 무덤, 정작 둥글어진 것은 봉분이 없다.

흰 달

생전 그가 좋아하던 목련이었다. 저녁 가느다란 바람 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그것은

뿌리 끝에서 몸통을 타고 올라온 음계가, 떨면서 입을 열고 심연의 침묵을 나무 끝에 매달아 흔드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남양주 봉인사의 지장전에 잠들어 있다.

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

 

창원행 고속버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려 안간힘 쓰던 햇빛의 언어들,

말하려 해도 침묵의 움푹 파인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이내 흐느낌이 되던 생각들,

입 다문 그대로, 또 다른 심연에서 어둠 껍질을 벗기며 하얗게 떨리는 음계로 피어나고 있었다.

 

이름 부르면 조금 느리게 돌아보던 몸짓, 출판사 일 마치고 부천행 급행전철을 타러 종종걸음 치던 뒷모습처럼 생생하게

오늘도 어스름 저녁을 흔드는

 

흰 목련.

 

마음 끝에 울컥, 솟구쳐 걸리는 흰 달처럼

생전 별 말 하지 않고 말하던 그가 불쑥 요렇게 찾아와 말 걸 때도 있다.

발바닥

 

어떤 삶을 웅숭깊은 삶이라 할 것인가. 들여다보면 발바닥 흉터가 깊다. 쩍쩍 금 간 논바닥 같다. 땅거미 내려앉고 서릿발 돋은 일생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바닥으로 끝없이 가라앉으며 잠든 당신, 푸푸거리는 숨소리 사이사이 거친 바람이라도 부는지 몇 토막 잠꼬대가 논두렁을 타고 넘는다. 지게 가득 나락 가마니를 옮기다 다친 목 척추 통증보다 더 시퍼렇게 밤마다 가슴팍에서 태어나는 열세 살 어린 별을 만나고 오셨나. 이불 사이로 삐죽 나온

거북 등 같은 발바닥 깊은 흉터 몇 개가 천체도로 떠오른다. 균열로 기록된 세월의 서책이여, 새끼들 배불리 먹이면 맨발도 아프지 않던 그 생애의 문장을

나 이제야 읽는다. 내 추수의 기쁨 뒤에서 딱딱하게 굳고 쩍쩍 금 간 채 신음도 없이 엎드린 당신의 들판, 중년이 되어서야 겨우 철들어 경배를 한다. 부처의 발바닥 같은, 그 발바닥 보륜 같은,

길 위의 한 생애가 새긴 발바닥 경전.

제주 활화산

나지막한 현무암 돌담길 같았던 사람, 큰 눈에

제주 바다 푸른빛 담고 있던 사람,

내심(內心) 깊어 묵묵했으나 손이 따뜻했던 그가

 

중문의 베릿내 해안에 흰 꽃 피웠다. 한 줌 뼛가루로 피운 흰 바람꽃, 그런 꽃 피운다고 누가 좋아하나? 묻기도 전에, 기어이,

물의 집이고 삶의 ‘물집’이던 고향 바다와 하나 되었다.

그는 시의 활화산이었다.

제주 오름을 사랑하고, 제주 문화와 역사를 뜨겁게 꽃피우고 싶어 하던 사람,

 

관광단지 된 조그마한 바다 마을 베릿내, 옛날 그 숨비소리를 끝끝내 품은 숨비기꽃 때문이었을까?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를 지키려 애쓰던 그가

제주 칸나의 시뻘건 꽃잎같이 터져 솟구치던 시만 남겨놓고, 풍문도 없이

 

바다의 화엄이 되었다. 예순,

아직 몇 구비나 남아 있는, 걸어가야 할 길을 제주 바다, 그 경계 없는 푸른빛 속으로 끌고 가 버렸다.

전율에는 거짓이 없다던, 아아

 

제주의 시인 정군칠!

 

날개 없이 날 수 있다던 달의 난간, 그 아슬한 송악산 절벽의

꽃이 된 시인, 기어이 벼랑 기어올라 영영 지지 않는 바다의 화엄이 되고만 시인,

 

그러고 보니, 이별이라는 말, 참 칼끝 같다.

형님, 평안이 가세요. 마지막 인사에도 묵묵부답, 그저 파도에 씻겨갈 뿐이어서 더 막막한 그리움.

그래. 그 바다에는 이승과 저승, 경계 없으니 이별도 없다.

7월 폭염 아래, 더 시퍼렇게 일어서는 우리들 그리움만 남겨놓고.

* '물집'은 정군칠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 시 몇 곳에 정군칠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시의 자연스런 표현을 위해 별도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일족

선산 언덕에서 머윗대를 베어왔다. 껍질을 벗기는데 손톱 밑까지 까맣게 물들었다.

 

살과 뼈가 삭아 물이 되고 흙이 된 조상의 영토에 뿌리박아 굵고 길게 자란 머윗대, 생각하면

 

까맣게 물든 손끝이 내 조상이 다녀간 흔적 같다.

 

까마득한 후손을 머윗대 되어 찾아와 손끝에 풋내 흔적 남기고 음식이 되는 지극, 생각하니

 

머리카락 쭈뼛 일어선다.

 

창문 열고 하늘을 본다. 듬성듬성 박혀 있는 구름들, 하늘 손끝에 남은 머윗대 껍질 벗긴 흔적 같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강이 되고 산이 된 조상의 몸과 숨소리 있었던 자리 같다.

 

생각하면 머윗대와 물과 흙과 하늘과 구름과 나는 그리 멀리 않은 피붙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데는 몇 번이나 비가 내리고 햇빛과 바람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감았다 풀기를 되풀이했을까.

 

족보에도 나오지 않는 문중 피붙이들이 우리 집에 모여 수런수런 생각 꽃피우는 날이다.

상도여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나오는

그 여관방이 내가 애용하는 숙소였다.

취객들 목소리 때문에

조그마한 창문이 밤새도록 덜컹거릴 때가 있었다.

하루는

자정 가까이에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골목에서 목청껏 부르는 합창이

어둠을 뚫고 4층까지 단숨에 솟구쳐 올라왔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보니

시 쓰는 은기와 원경이, 경섭이,

그리고 또 몇 명의 얼굴….

지금도 감자탕에 소주 몇 잔 기울이고 싶은

찬바람 몹시 부는 가을 끝자락이었다.

왈칵, 한 덩어리 꽃

오래 한 여자를 앓아온 속 깊은 그가, 드디어

꽃다발을 들고 고백하려는 찰나

말보다 울음 한 덩이가 먼저 그녀 앞에 붉게! 쏟아졌다고 한다.

목구멍이 왈칵, 한 덩어리 꽃이다.

망설임과 적막한 두려움과 설렘이 뒤엉킨 담쟁이덩굴 담장 아래

아무리 깊은 밤 되어도

일평생이 환할 그 꽃.

세상 파란까지 다 꽃이 되게 하는 한 덩이 아름다운 힘.

시인수첩 시인선 054

『육탁』

- 지은이 / 배한봉

- 펴낸 곳 / (주)여우난골

- 펴낸 때 / 2022년 1월

*제9회 풀꽃문학상(대숲상) 수상(2022) 시집

배한봉

- 1962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으로 『흑조黑鳥』(1998), 『우포늪 왁새』(2002), 『악기점』(2004),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2006), 『주남지의 새들』(2017), 『육탁』(2022) 등이 있음.

- 현대시작품상(2010), 소월시문학상(2011), 김달진창원문학상(2017), 박인환문학상(2021), 풀꽃문학상(2022) 수상.

- 시인동네 편집주간, 경희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