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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2. 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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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방의 배 깎는 시인 도종환
번호 : 316   글쓴이 : 기 자영
조회 : 24   스크랩 : 0   날짜 : 2006.12.20 00:28
사람과 세상
[인권이 만난 사람] 산방의 배 깎는 시인
  
             
시인은 시에 매달리며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과 절망을 버텼다. 민족, 민중의 아픔이든 시대의 아픔이든 시인이라면 아픔에 정직해야 하는 게 우선인데 개인의 아픔에도 정직해야 한다는 문제를 고민했고, 그렇게 고민한 것들이 시가 되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일일랑 놓고 쉬었다나 가세요
몇 차례 비가 뿌리던 흐린 날, 오후 세시가 넘어 충북 보은의 외지고 작은 마을, 거기서도 간신히 난 좁디좁은 비포장길을 달려 시인의 산방에 도착했다. 11월 중순이니 오후 세시가 넘은 시간이란 곧 저물 녘인데 비까지 내린 흐린 날이어서 사진 촬영이 걱정스러웠다.
도착해 인사가 오가자마자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들이대며 급하게 사진 먼저 찍어야 했다. 산방 뒤편에서부터 앞마당으로 도는 동안 햇살이 잠시 나와주어 다행히 그 햇살에 의지해 사진도 찍고, 떨어지고 남은 잎들만으로도 아름다운 나무들의 모습을 고운 물감이 번진 수채화처럼 감상할 수 있었다.
‘외지고 고요한 곳에 사는 이는 복이 있나니….’ 이런 문장이 저절로 떠오를만치, 시인의 산방은 꾸밈도, 위세도, 소리도 없이 풍경 속에 깊이 들어 있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일일랑 놓고 쉬었다나 가세요.”
안에 들어 다탁에 마주앉자 시인의 첫마디는 이랬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런 인터뷰 일일랑 단박 파투 놓고, 시인의 산방살림 얘기와 저녁이 내리는 숲속 나무들 모습만 지켜보다 오고 싶었다.



구구산방
시인이야말로 그의 첫마디처럼 모든 일일랑 놓고 무조건 쉬어야 했다.
시인이 수십 년 동안 몸과 마음을 밤낮없이 일과 사람에 쏟아 부으며 한 시대를 통과해오는 동안, 신경이 혹사를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그를 쓰러뜨린 거였다. 시인 자신도 처음 들어보았다는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명. 한번 쓰러지고 난 뒤부터는 면역력이 떨어져 잔병이 걸리더라도 낫지 않는다. 아무리 약을 먹고 병원을 다녀도 그로 인해 생긴 다른 질환들이 낫지를 않는다. 도리 없이 세상의 일을 무조건 놓고 이곳에 들어와야 했다.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기 4년. 자연치유의 힘 덕분으로 4년 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우리 심신의 병이란 너무 빠른 속도로 사는 데서 온다고 본다며, 자신이 쓰러진 것도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산방의 처음 주인이 거북처럼 오래 산다는 의미로 지은 구구산방이라는 이름을 그는 느리게 느리게 살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구산방에 들기 전, 시인은 해직교사에서 10년 만에 복직하여 중학교 아이들과 연애하듯이 5년 동안 함께했었다. 복직해 처음엔 아이들과의 괴리로 갈등했지만, 나중엔 그 학교가 EBS에서 주는 ‘제 1회 신나는 학교 상’을 받으며 함께한 프로그램들이 다른 학교에도 소개되는 보람과 성과, 기쁨이 있었다. 이제 퇴직한 지금 그 5년이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된 셈이다. 시인과 선생님이라는 인생의 두 큰 길이었는데, 양보한다면 어느 쪽을 양보하고 싶으시냐고 물었다(시인이 그 둘 중 어느 쪽도 양보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학교는 이제 그만뒀으니 그쪽에 할 일은 없고, 시 쓰는 일을 더…, 시를 잘 써야겠지요.”
시인은 산속 생활은 겨울이 문제여서 땔감 준비가 큰일이고, 보일러가 얼어 터져 물도, 불도 안 들어올 때가 많다며 다가온 겨우살이 걱정도 내비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회복됐고, 올겨울엔 시 쓰기에 집중하며 미뤄둔 산문도 마무리할 것이라고 했다. 시인의 구구산방에는 텔레비전과 신문은 없지만, 전화와 노트북은 두고 있다. 또 클래식 음악을 즐기므로 오디오를 두고 있다.

접시꽃 당신
시인 도종환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그의 두 번째 시집 「접시꽃 당신」.
32세 때 시인은 아내를 잃었다. 생후 4개월 된 갓난아기와 두 돌 된 어린 아이를 남기고 아내는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죽음이란 한참 뒤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던 삼십대 초반. 갑자기 덮쳐온 아내의 죽음도, 짧은 사랑도, 남은 두 어린 아이도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 대한 책임, 아이들에 대한 책임, 어떻게든 눈앞에 닥친 이 상황을 추슬러야 했다. 다행인지 어쩐지 그런 상황을 추스르게 해준 것이 시였다.
1985년 8월 아내와 사별, 그해 12월 동인지 「분단시대」에 ‘접시꽃 당신’ ‘암 병동’을 비롯해 5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이 시들이 문제가 되어 시 구절에 빨간색 밑줄이 그어지고, 장학사에게 불려가 “이것이 의미하는 속뜻이 무엇이냐”는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 일로 시인은 옥천의 벽지 학교로 쫓겨 갔다. 당시 시인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시기였는데, 어미도 없는 아이 둘을 부모님께 맡기고 벽지로 쫓겨 가야 했으니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한꺼번에 온 슬픔, 아픔, 절망, 상실을 어떻게 견디셨느냐 했더니, “그래도 그곳 아이들이 시골아이들답게 순박하고…, 그래서…”라는, 학교의 아이들을 사랑하던 선생님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있다가 붙이는 한마디, “그때 시대가 그랬어요.”
도대체 어떤 시 구절이 그리 문제이길래 아내의 사별을 몇 달 전에 겪은, 또 남은 두 어린 아이를 돌보아야 할 아버지를 좌천시켜 벽지로 떼어놓아야 할 정도냐고, 문제 된 그 시 구절을 알려달라고 했다. 시인의 지난 상처와 아픔을 상기시키는 것 같아 송구스러워하면서.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이런 구절이 ‘접시꽃 당신’의 문제 부분이고,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 때도 / 우리들은 온몸 던져 싸우거늘 /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 참답게 산다는 것은 / 참답게 싸운다는 것 / 싸운다는 것은 지킨다는 것 / 빼앗기지 않고 되찾겠다는 것…’ 이런 구절이 ‘암병동’의 문제 부분이라는 것이다.
“아내도, 암병동의 다른 환자들도 암과 싸워 이기기를 기원하며 쓴 시였는데…, 그때 시대가 그랬어요.”
시인은 좌천돼 간 벽지 학교에서 시에 매달리며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과 절망을 참아내며 버텼다. 민족, 민중의 아픔이든 시대의 아픔이든, 시인이라면 아픔에 정직해야 하는 게 우선인데 개인의 아픔에도 정직해야 한다는 문제를 고민했고, 그렇게 고민한 것들이 시가 되었다. 그러다 당시 실천문학사에 있던 시인 김사인의 출판 권유에 처음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개인의 일을 쓴 걸 가지고 시집을 내느냐”며 거절했던 그 시 모음이 1986년 12월 「접시꽃 당신」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게 된 것. 뜻밖에 시집이 1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갑자기 유명 시인이 되고 유명세를 치렀는데, 그 또한 시골학교 선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 내가 아내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팔아서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이어졌고, 그 고민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해서도 실천의 길에 들어서서 함께하며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시인은 교육 현장의 당사자로서 교육 현실의 오랜 모순을 변혁하고 교육민주화와 희망의 참교육을 위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이전 단계인 전국교사협의회 일에 2년간 관여했다.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되자마자 당시로서는 불법인 국가공무원법 위반 집단행동 등의 이유로 즉각 해직당하고 감옥으로 가게 됐다. 이렇게 해서 문학을 시작한 첫길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을 수십 년 동안 걸어오게 된 것.

「접시꽃 당신」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우리 삶의 근본주제에 개인적 진정성의 힘이 더해진 기념비적인 시집이다. 100만이 넘는 판매 부수로 미루어 5.18 민주화운동 이후 고통과 상처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로와 희망이 필요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인으로 가는 길
시인은 산방에 파묻힌 후, 그곳에서만 쓴 시 60여 편을 묶어 아홉 번째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을 올해 봄 펴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산방에서 “자연이 내는 소리를 그저 받아 적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쓴 시들”이라고 했다.
‘축복’이란 시에서 시인은 ‘내게 오는 모든 건 다 축복이라고,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했던 어린 날도 축복이고,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축복이고, 병든 것도 통증도 축복이고, 죽음도 시련도, 이젠 이른 봄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고, 작게라도 물결 치며 살아 있는 게 다 축복’ 이라고 산방생활의 지금을 요약해줬다. 여러 겹의 생을 돌아온 사람의 자유와 대긍정을 노래한 것이리라.



시집 출간 직후 서울에서 「해인으로 가는 길」의 출판기념회와 인세 기증식이 열렸다. 시인은 몸과 마음의 치유, 그리고 재탄생의 의미 있는 실천행으로 「해인으로 가는 길」의 초판뿐 아니라 이후 판의 인세 전부를 베트남 푸엔성의 어린이들을 위한 평화학교 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이는 “베트남에 대한 마음의 부채도 있고, 시로 인해 생긴 이윤이 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축복의 내면을 누리는 시인이, 다른 한편 대중의 사랑을 흠뻑 받아온 시인이 그 축복과 받은 사랑을 되돌리는 세상 사랑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 하나의 현직, 문학집배원
이제 시인은 무슨 위원회 위원장, 무슨 단체의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모두 내놓고, 학교마저 퇴직하고 올 5월부터 단 하나의 현직 ‘문학집배원’으로 산다. 문학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사업의 하나인 이 일은 1주일에 한 편씩 좋은 시를 골라 감상을 붙여 직접 낭송으로 독자를 찾아가는 일이다. 좋은 시를 찾아 읽는 즐거움이 있어 좋고, 독자에게도 유익한 감상이 되도록 배달부 노릇을 잘하고 싶다고 했다. 시인은 이 시 배달부 일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묶인 시 작품은 먼저 ‘아름다운 가게’ 홈페이지 ‘시인의 선물’란에 1년간 매주 1편씩 기증한 시들이었다.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로 있는 박원순 변호사가 그에게 시인이니 시나 1편씩 기증하라 하길래 시인이 뭐 달리 내놓을 것도 없고, 그거야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해 시를 기증했던 것.

그러니 처음부터 이번 시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참, 시 기증 아이디어를 낸 박원순 변호사가 더 시인 같네요”라고 말하니 시인도 흔쾌히 웃었다. 시인을 둘러싼 동네는 가게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일이 다 아름다운 동네인가 보다.

배 깎는 시인은 눈물겨워라
처음 다탁에 같이 앉았을 때, 시인은 산야초 차와 배 한 개를 깎아 냈다. 시인이 털스웨터를 입은 등을 한껏 구부리고 또 고개를 많이도 수그리고 배를 깎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저 배 깎는 시인의 모습을 얼른 찍어요, 저걸 찍어야 해요” 하며 사진작가를 독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컷의 사진 촬영이 끝나고 시인이 말했다. “산방에 온 지인들이 내가 과일 깎고, 북엇국 끓여 밥상 차려내는 것 보면서 다들 그럽니다. 도종환이 이제 시집보내도 되겠다고, 과일 잘 깎지, 밥 잘하지, 이제 고마 시집보내 뿔자고.” 아름답고 깊은 농담이 지금 여기 있었다. 깊숙이 구부린 두툼한 털스웨터 등의 어둑신한 실루엣. 과도와 배를 모아 쥐고 깎는 저 두 손의 공손함이라니, 그 얼굴의 골똘함이라니, 온 몸태에 흐르는 조신함이라니, 몇 겹의 생을 돌아와 어둑신하게 앉아 오직 한 알 과일을 깎는 큰 누님만 같구나. 저절로 지분기(脂粉氣) 내려지고 말조차 돌아앉은 덕성의 큰누님만 같구나. 시인은 실제 4남매의 맏이이기도 했고, 수십 년 동안 세상의 큰형님 일도 책임껏 다했으니, 큰형님은 큰누님 아니런가, 또 큰누님은 큰형님 아니런가.

별, 그리고 풍경 소리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 차 타고 나가 저녁식사하자고 권했지만 시인은 귀찮다고 했다. 먹겠으면 자신의 집에서 먹어야 한다고, 인근엔 먹을 데가 없다고, 밥은 자신이 얼마든지 할 테니 먹겠으면 먹으라고 했다. 사진작가와 나는 시인의 북엇국도 궁금하고, 하여 모른 척 주저앉아 결국 시인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았다. 손님이라고 생선도 넓게 한 마리 구워냈고, 예의 북엇국도 끓여 낸 아주 괜찮은 밥상을 받은 거였다. 시인은 벽난로 앞에 앉아 자신이 방금 피워놓은 타는 장작불을 바라보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여기 생활이 그래요…, 자기 하나 따뜻하자고 이렇게 불 때고…” 참으로 못 말리는 죄의식, 못 말리는 순결성이다. 바깥에는 춥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 한 몸 따뜻하자고 이렇게 불 때는 일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서는 여전히 불편한 사람. 어쩌면 그런 여린 마음 때문에 일과 짐을 너무 많이 져오다가 병이 난 사람인데 말이다. 판화가 이철수 씨가 구해다 밖에 매달아줬다는 풍경이 시인을 만나고 나서 댕그랑댕 처음으로 울었다. 작으면서도 맑고 또렷한 소리였다. 풍경 소리마저 다 들었다. 이젠 일어설 시간이다. 내려선 뜨락에는 시인이 많이도 좋아하는 별이 흐린 날씨에도 제법 떠올라 있었다. 오늘은 시인의 별을 시인 혼자만 줍게 놔두지 않고 이렇게 산방까지 밀고 들어와 기어코 한 줌을 빼내 가는 짱! 좋은 하루였다.


★ 이진명님은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단 한 사람>등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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