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30. 도종환 시/1. 도종환 시 모음

월정月靜 강대실 2025. 4. 27. 10:24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단풍드는날/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활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봉숭아 / 도종환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속에 내가

네 꽃잎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여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 남을 수 없는

거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거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들길 / 도종환

들길 가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만나거든

거기 그냥 두고 보다 오너라

숲속 지나다 어여쁜 새 한마리 만나거든

나뭇잎 사이에 그냥 두고 오너라

네가 다 책임지지 못할

그들의 아름다운 운명 있나니

네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굽이굽이 그들의 세상 따로 있나니

 

 

 

저녁노을/ 도종환

당신도 저물고 있습니까?

산마루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저녁 해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뿜어져 나오는 해의 입김이

선홍빛 노을로 번져 가는

광활한 하늘을 봅니다

당신도 물들고 있습니까?

저를 물들이고 고생대의

단층 같은 구름의 물결을 물들이고

산을 물들이고 느티나무 잎을

물들이는 게 저무는 해의

손길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구름의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처럼 나는 내 시가

당신의 얼굴 한 쪽을

물들이기를 바랬습니다

나는 내 노래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당신을 물들이고

사라지는 저녁 노을이기를

내 눈빛이 한번만 더 당신의 마음을

흔드는 저녁 종소리이길 소망했습니다

시가 끝나면 곧 어둠이 밀려오고

그러면 그 시는 내 죄후의

시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내 시집은 그때마다

당신을 향한 최후의 시집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떨었습니다

최후를 생각하는 동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한 세기는 저물고

세상을 다 태울것 같던 열정도

재가 되고 구름 그림자만

저무는 육신을 전송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저물고 있습니까

스러져 가는 몸이 빚어내는 선연한

열망 동살보다 더 찬란한 빛을

뿌리며 최후의 우리도 그렇게

저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무는 시간이 마지막까지

빛나는 시간이기를,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하늘 위에

마지막 순간까지 맨몸으로도

찬연하기를

 

 

 

어떤 마을 - 도종환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

* 베드로시안은[그런 길은 없다]에서 "아무도 걸어가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고 한 바 있다.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사랑을 하면서도 잎 지는 소리에 마음 더 쏠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흩어지는 산향기에 마음 더 끌려라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나는 소쩍새 소리에 마음 더 끌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사라지는 별똥 한 줄기에 마음 더 쏠려라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혼자사랑


혼자서만 생각하다 날이 저물어
당신은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혼자서만 사랑하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갑니다
남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게
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같습니다

 

 

봄산

 

 

거칠고 세찬 목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것 아니다
눈 부릅뜨고 악써야 정신이 드는 것 아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몸짓들 모여
온 산을 불러 일깨우는 진달래 진달래 보아라
작은 키 야윈 가지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철쭉꽃 산철쭉꽃 보아라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다시 오는 봄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칸나꽃밭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아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

 

 

산사문답 

 

이 비 그치면
또 어디로 가시려나

대답 없이 바라보는 서쪽 하늘로
모란이 툭 소리없이 지는데

산길 이백 리
첩첩 안개구름에 가려 있고

어느 골짝에서 올라오는 목탁 소리인고
추녀 밑에 빗물 듣는 소리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낙화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꽃이 돌아갈 때도 못 깨닫고
꽃이 돌아올 때도 못 깨닫고
본지풍광(本地風光) 그 얼굴 더듬어도 못 보고
속절없이 비 오고 바람 부는
무명의 한 세월
사람의 마을에 비가 온다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시든 국화 

 

시들고 해를 넘긴 국화에서도 향기는 난다
사랑이었다 미움이 되는 쓰라린 향기여
잊혀진 설움의 몹쓸 향기여

 

 

오늘밤 비 내리고 

오늘밤 비 내리고
몸 어디인가 소리없이 아프다
빗물은 꽃잎을 싣고 여울로 가고
세월은 육신을 싣고 서천으로 기운다
꽃 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 없어라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꽃잎 인연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그리움도 설레임도 없이 날이 저문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얼굴엔 검버섯 피는데
눈물도 고통도 없이 밤이 온다
빗방울 하나에 산수유 피고 개나리도 피는데
물결도 파도도 없이 내가 저문다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

* 도종환시집[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당신의 무덤가에 


당신의 무덤가에 패랭이꽃 두고 오면
당신은 구름으로 시루봉 넘어 날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 앞에 소지 한 장 올리고 오면
당신은 초전녁별을 들고 내 뒤를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가에 노래 한 줄 남기고 오면
당신은 풀벌레 울음으로 문간까지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 위에 눈물 한 올 던지고 오면
당신은 빗줄기 되어 속살이 젖어오네 *

 

 

보리 팰 무렵 


장다리 꽃밭에 서서 재 너머를 바라봅니다
자갈밭에 앉아서 강 건너 빈 배를 바라봅니다
올해도 그리운 이 아니 오는 보리 팰 무렵
어쩌면 영영 못 만날 사람을 그리다가 옵니다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사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 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우기


새 한 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 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배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있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

 

 

그리움이 오면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쓸쓸한 세상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빗발이 멈추면 나도 멈출까
몰라 이 세상이 멀어서 아직은 몰라
아픔이 다하면 나도 다할까
눈물이 마르면 나도 마를까
석삼년을 생각해도 아직은 몰라
닫은 마음 풀리면 나도 풀릴까
젖은 구름 풀리면 나도 풀릴까
몰라 남은 날이 많아서 아직은 몰라
하늘 가는 길이 멀어 아직은 몰라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세우

가는 비 꽃잎에 삽삽이 내리고
강 건너 마을은 비안개로 흐리다
찔레꽃 찬 잎은 발등에 지는데
그리운 얼굴은 어느 마을에 들었는가
젖은 몸 그리움에 다시 젖는 강기슭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어떤 날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 닦고 또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겁의 강물 위를
소리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무상 흘러갔으면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서리꽃

 

서리꽃 하얗게 들을 덮은 아침입니다
누군가의 무덤가에 나뭇짐 한 단 있습니다
삭정이다발 묶어놓고 무덤가에 앉아
늦도록 무슨 생각을 하다 그냥 두고 갔는지
나뭇가지마다 생각처럼 하얗게 서리꽃이 앉았습니다
우리가 묻어둔 뼈가 하나씩 삭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남아서 가시나무 가지를 치고
삭정이다발 묶으며 삽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우리는 가져갈 수 있는지 모르지만
오늘도 가야 할 몇 십리길이 있습니다

오늘도 서리가 하얗게 길을 덮은 아침들에 나섭니다

 

 

 

좋아요공감
공유하기
게시글 관리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