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14. 육탁시/19. 비 맞는 무화과나무​

월정月靜 강대실 2025. 1. 27. 11:44

비 맞는 무화과나무

물 젖어 풀린 화장지처럼 무화과

과육이 흘러내렸다, 나무 아래 서성이는

내 어깨에 머리에 무화과 맨살이

취객의 오물처럼 엉겨 붙었다.

 

열매란 둥글고 단단하게 자라서

익는 것이라 여긴 내게

비 맞는 무화과, 이런 삶도 있다고

꽃 시절도 없이 살았던

뚝뚝, 제 안에 고인 슬픔을

빗물로 퍼내는 것 같다,

웅덩이 같은 몸을 가진 무화과.

 

누구나 웅덩이 하나씩은

가지고 살지, 상처를 우려내

가뭄 든 마음을 적시기도 하지,

그러나 너무 오래 고여 있으면

안 되는 웅덩이,

퍼 내지 못하면 결국

출렁이지도 못하고 뭉크러지는

영혼의 폐허가 되고 말지.

 

취객 같은 무화과나무 아래

내 가슴속의 무화과 어디 갔나, 나는

폐허처럼 서서 한참이나 비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