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14. 육탁시/5. 나는 벗긴다

월정月靜 강대실 2025. 1. 27. 11:41

나는 벗긴다

퇴직하고 시골로 간 친구가

한 보따리 농산물 놓고 갔다.

뭔가 벗기는 일은

가을 저녁의 별미 같은 것.

티븨를 보는 대신

늙은 호박 껍질을 벗기고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고

도라지 껍질까지 벗긴 뒤

비닐봉지 뒤적거려 머윗대를 꺼낸다.

손가락 까매지도록

가을 저녁을 벗긴다.

생활의 껍질을 벗긴다.

나를 벗긴다.

난장판 거실 어느 구석에서

시골 친구가 흘리고 간

풀벌레, 울다 그쳤다 다시 운다.